그린북 (Green Book)
장르: 드라마
감독: 피터 패럴리
출연: 비고 모텐슨 (토니 발레롱가), 마허샬라 알리(돈 셜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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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헬프(The help, 2011), 히든피겨스(Hidden Figures, 2016) 등으로 이어지는 50~70년대 미국의 흑인인권을 소재로 한다.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답게 탄탄한 스토리는 물론이거니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까지 곁들여 잔잔한 여운과 큰 감동을 선물한다.
걔 중에서 그린북은 단연 최고다. 박장대소가 나올 정도의 코믹적인 요소와 예측 불가능한 극적인 요소가 환상적으로 조화되었다. 덕분에 2시간이 넘어가는 상영시간이 지겨울 겨를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아프리칸계 미국인들의 리듬감 넘치는 억양과 쇠고기 다시마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감칠맛(?) 만점의 표현은 언제나 영화의 장면 장면을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린북에서는 이 역할을 이탈리안계 미국인인 '토니'가 맡았다. 그는 아프리칸계 미국인 못지 않은, 솔직담백하면서 개성이 뚜렷한 억양과 표현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한다. 그는 이민 2세대의 하층민이지만 누구보다도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거칠긴 해도 옳고 그름이 확실한 남자다.
'돈 셜리 박사'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아프리칸계 미국인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표준어를 정확하게 구사하며 교양과 지식이 넘치는, 그 어떤 백인들보다도 더 우아하고 심지가 굳은 인물이다.
백인과 흑인, 상층민과 하층민, 표준어와 비속어, 교양과 다소의 천박함 등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는 전혀 다른 두 남자의 만남. 영화의 핵심을 찌르는 관람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
'토니'는 운전을 하면서 켄터키 주에서 산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게걸스럽게 뜯어 먹고 있다. 그는 곧 '돈 셜리 박사'에게 같이 먹겠냐고 제안한다.
"Hey, you want some or not?"
(이거 줘 말어?)
"No. I prefer not to get grease on my blanket."
(됐어. 나는 담요가 더러워지지 않는 걸 원해.)
담요가 더러워지고 어쩌고하는 이유로 단박에 제안을 거절한 박사. 하지만 토니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이 재미없는 남자가 일단 후라이드 치킨을 입에 갖다대기만 한다면 '그것'을 좋아하게 될 거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Take it. I'm throwing it in the back."
(받아. 안 그러면 뒤에다 그냥 던질거야.)
"Don't you dare."
(너 그러기만 해 봐.)
"Then you better take it."
(자, 그러면 그냥 받는 편이 좋을 걸.)
토니는 포크랑 접시가 필요하다 어쩌고 하며 아이처럼 징징대는(아이와는 정 반대의 목적으로) 박사의 손에 결국 닭다리 하나를 건넸다. 박사는 처음으로 하늘을 날려고 준비하는 백조처럼 아주 우아하고 조심스럽게 닭고기를 한 입 물어 뜯는다. 박사의 그런 모습을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지켜보던 토니가 묻는다.
"What? no good?"
(왜 그래? 별로야?)
"Umm"
(음!)
박사가 '음'하고 신음소리를 내는 짧은 장면에 나는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한 음절의 감탄사가 나를 이렇게 웃기게 하다니. 몇 번을 반복해서 봐도 너무 웃기고 심지어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기다.
후라이드 치킨을 앞에 두고 온갖 고상한 소리를 늘어내며 한사코 거절하더니 결국 한 입 먹고 나서 내뱉는 저 극적인 한 마디. 박사는 난생 처음 먹어보는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의 맛에 순수하게 감탄했고 할 말을 잃었다. 모르긴 몰라도 최근에 겪은 일 중 가장 놀라울 일이었을테다.
사실 이 장면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두 사람이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신분만큼이나 성격도 생활습관도 천지 차이인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어른과 아이 또는 연인과 부부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유치한 대화처럼 단순하고 재미있었다.
잠깐 영화 얘기를 떠나서 나는 서양 문화의 이런 점이 참 좋다.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에 저렇게 막돼 먹은 유치한 이야기가 가능하다니. 아무리 토니가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우리나라라면 꿈조차 꾸지 못 할 일이다.
일단 '토니' 같은 사람이 아~주 희귀할 뿐더러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경어와 신분의 장벽을 넘어, 잘못하면 짤릴 지도 모를 주제넘는 언행을 할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격 상의 N극과 S극의 만남은 있어도 신분 상의 N극과 S극의 만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을 담은 신데렐라 이야기는 TV에나 존재할 뿐이고 우정은 같은 지역이나 학교 출신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는다. 슬픈 현실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애처가인 '토니'는 아내의 간절한 부탁에 꾸준히 그녀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있다. 어느 날, 한동안 그런 토니의 모습을 지켜보던 '돈 셜리 박사'는 호기심이 발동해 그에게 묻는다.
"What an God's green earth are you doing?"
(너 대체 뭐하는 거야?)
"A letter."
(편지)
"Looks more like a piecemeal ransom note."
(내가 보기에는 몸값을 요구하는 거 같은데)
그러고는 박사는 토니의 편지를 읽어본다.
"Deer Dolores. D-E-A-R. This is an animal. I am meeting all the highly leading citizens of the town. People that use big words, all of them. But you know me, I get by. I'm good bullshitter. As I'm writing this letter, I'm eating potato chips and I'm starting to get thirsty. I washed my socks and dried them on the TV. I should have brung the iron. You know this is pathetic, right?"
[사슴 돌로레스에게. D-E-A-R. (틀린 철자 Deer을 지적하며) 이건 동물이지. 나는 요즘 마을의 높으신 분들을 만나고 있어. 어려운 말들만 골라쓰는 사람들 말이야. 하지만 나를 잘 알듯이 그런 건 내게 문제가 안 돼. 나는 아주 훌륭한 허풍쟁이잖아. 이 편지를 쓰면서 감자칩을 먹고 있는데 목이 좀 마르기 시작했어. 내 양말을 빨고 TV 위에다 말렸지. 다리미를 가지고 왔어야 했는데. 너 이 편지 아주 형편 없는 거 알고 있지?]
번역을 하면 그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데 'Animal'과 'Pathetic' 이란 말이 너무 웃겼다. 박사의 진지한 태도와 함께 진짜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표정이 더욱 상황을 웃기게 한다.
위의 장면과 마찬가지로 한동안 같은 장면을 돌려보면서 혼자 키득키득거렸다. 문득, 영화의 감독인 '피터 패럴리'의 필모그래피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코미디 전문 감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코미디 영화를 찍었다.
이 장르를 좋아한다면 꼭 한 번쯤은 들어봤을 '덤앤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등 훌륭한 작품이 많다. '덤앤더머' 같은 건 아직 안 봤는데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So, if I am not black enough and if I'm not white enough and If I'm not man enough, then tell me, what am I?"
(만약 내가 흑인이 되기에도 백인이 되기에도 한 남자가 되기에도 충분치 않다면, 내게 말해줘. 도대체 나라는 사람은 뭐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셜리 돈 박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춰두었던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아무리 스스로 옳다고 믿을 지라도(실제 옳은 일이라 하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흑인들에게도 백인들에게도 환영받지 못 하는 '셜리 돈 박사'. 더군다나 아내에게 버림받고 하나 있는 동생하고는 서로 안부도 묻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상태이다. 매일 밤 혼자 고독하게 술을 마시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 감춰진 고통과 슬픔이 있을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이토록 깊고 어두운 그늘이 자리잡고 있었다니... '토니'가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젖어가는 옷과 떨어지는 체온을 잊은 채 멍하니 서서 박사를 바라보았던 건, 관객도 짐작조차 하지 못 했던 '진실'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반환점이 되어 둘은 마침내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의 등을 완벽하게 받춰주는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된다.
감독의 마법같은 연출에 정말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정확히 필요한 요소를 정확히 필요한 부분에 넣었다. 유머와 긴장, 감동과 여운이 이처럼 환상적으로 조화된 영화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네이버 평점 만점은 10점이지만 10점으로도 부족하다. 12점 이상의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마지막으로 내 생애 최고의 영화인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으로 열연한 '비고 모텐슨'을 못 알아본 건 스스로에게도 참 민망하다. 영화가 끝난 후 검색을 하고나서야 그가 아라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시의 나는 '레골라스'보다 '아라곤'이 더 잘 생겼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흔적이 아주 역력하게 엿보이는 그의 얼굴이지만 이렇게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이상 내가 가지고 있던 '비고 모텐슨' = '아라곤' 이라는 이미지는 앞으로 무의미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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