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횡단 자전거 여행 - 오스트리아, 비엔나 (2019.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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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빈)에 도착했다. 누가 예술에 도시 아니랄까봐 여기저기 개성이 흠뻑 묻어나는 대중예술과 예사롭지 않은 조형물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도나우 강을 따라 나있는 자전거 도로를 가득 채운 스프레이 페인트 그림은 그 엄청난 규모와 함께 그림에서 엿보이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나를 놀랍게 했다.
일 박에 14유로 하는 호스텔에 서둘러 짐을 내려놓고 일단 허기를 채우러 식당으로 향했다. 목표는 Centimeter. 이곳에서 나는 슈니첼을 배가 터지게 먹을거다!
가게 안 인테리어가 참 마음에 든다. 테이블과 의자, 카운터, 바닥, 그리고 천장 등 대부분이 목재로 되어 있다. 마치 산 속 깊숙이 자리잡은 산장을 방문한 듯 편안한 기운이 감돌고 주변은 밤색으로 가득하다.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은 퐁퐁 터지는 공기방울처럼 상큼하고 친절했다. (참고로 남자였다.) 방근 전에 만난 들소처럼 무뚝뚝했던 호스텔의 여직원과 완전 대비된다.
그에게 현지어로 된 메뉴판을 보고 못 읽겠다고 말하자 바로 영어로 된 메뉴판을 가져다 주었다. 영어 메뉴판에는 친절하게 메뉴마다 사진이 붙어있었다. 이 가게가 점점 더 좋아진다.
나는 처음 가는 가게에서는 메뉴판을 보는둥 마는둥 슬쩍 훑어보고 바로 대표 메뉴를 시켜버리는 습관이 있다. 귀차니즘이다. 헌데 언제부턴가 이렇게 주문을 하고 나면 뭔가 찝찝함이 느껴졌다.
뭐랄까? 메뉴판을 찬찬히 살펴보며 뭘 먹을까하며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 기회를 뺏겨버리는 느낌? 또는 이 가게에는 어떤 맛있는 음식들이 있을까라며 더 알아가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느낌?
특히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는 유럽의 식당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랬다. 현지 음식이 일목요연하게 소개된 메뉴판은 나같은 이방인에게는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유물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게의 한적하고 격식 없는 분위기에 힘입어 메뉴판을 한동안 수험생마냥 뚫어지게 쳐다본 후 예정대로 슈니첼과 하우스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슈니첼은 송아지 고기로 만든 튀김 요리이다. (아쉽게도 송아지 고기가 없어서 닭고기 슈니첼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사진으로 보면 알 수 있듯 돈가스와 거의 흡사하다.
'예술의 도시' 오스트리아. 아쉽게도 너무 예술에만 힘을 썼나 보다. 이건 뭐... 돈가스를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다는 잘 만들 거 같다! 이건 심지어는 그 유명한 학식(學食) 돈가스보다도 못하다!
두툼하고 볼륨감 넘치는 우리나라 돈가스에 비해 너무 얆다. 당연히 육즙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레몬즙은 찾아볼 수 있다.) 여기까지는 어찌어찌 이해한다. 하지만 소스라치고 갖다준 토마토 케첩에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아니... 일본처럼 대대로 내려오는 특제 데미글라스 소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돈가스 소스 정도는 뿌려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슈퍼마켓에서 사 온 토마토 케첩이라니?
하지만 함께 나온 밥에 비하면 슈니첼은 그야말로 최고의 음식이었다.
밥은 이게 우리가 먹는 쌀과 같은 범주에 들어가는 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석하고 맛이 없었다. 마치 라면 국물에 넣은 밥을 다시 꺼내서 식힌 것처럼 찰기나 식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잠시 쌀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 한국, 일본에서 쓰는 쌀 품종은 대부분 '자포니카'. 다른 품종에 비해 영양소는 떨어지지만 유난히 찰지며 윤기가 난다.
'자포니카' 쌀에 익숙한 우리는 다른 쌀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우리는 심지어는 쌀 소비가 가장 많은 베트남이나 태국 등에서 사용하는 쌀도 맛에 있어서든 한 수 아래로 생각한다. 하물며 빵을 주식으로 먹는 유럽에서는 어떨까?
나는 가끔 만나는 유럽이나 북미 사람들에게 '자포니카'와 '인디카'의 다른 점을 침 튀겨가며서 열심히 설명한다. 한국인답게 한중일에서 쓰이는 쌀이 맛에 있어서 최고라고 말이다.
헌데 침을 너무 많이 튀겼는지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들은 보통 둘 다 맛있다고, 큰 차이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큰 차이를 모르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쩌면 아시아 사람인 우리가 누가 영국인이고 프랑스인이고 독일인인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밥 한 톨과 슈니첼 한 조각 남김없이 맛있고 깨끗하게 그릇을 비웠다.
13유로(슈니첼+맥주)라는 비싼 가격 이외에도 한 10일 넘게 빵과 우유, 당근과 콩만이 내 목구멍을 통과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럽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빈 미술사 박물관'을 찾았다. (참고로 나머지 둘은 '파리 - 루브르 박물관' 과 '마드리드 - 프라도 박물관' 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미술에 뜨거운 관심이 있었는지...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유명하다면 꼭 빼놓지 않고 들르고 있는 미술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같이 '오르세 미술관' 등 몇몇 정말로 가보고 싶은 미술관을 놓치고 말았다ㅠ.ㅠ)
꼭 유명하다고 해서 미술관에 들르는 건 아니었다. 이번 자전거 여행의 테마는 지나가는 나라의 역사/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미술은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므로 괴롭더라도(?) 결코 빼놓을 수 없었다.
'괴롭다'라고 쓴 건 항상 미술관에 입장한 지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나면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내 두뇌의 몇 안 되는 대뇌피질은 더 이상 활동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즉, 내 허접한 집중력으로는 미술관 가득 채운 세기의 걸작들을 찬찬히 살펴보기에 큰 무리가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미술관 전체를 한 바퀴 돌아보는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지막지한 입장료[빈 미술사 박물관(16유로) + 오디오 가이드(6유로)]로 인해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Hungry 의식과 더불어 걸작, 대작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험한 기운을 받아 나 스스로가 왠지 그리스의 철학자라도 된 듯 고상해지기 때문이었다. 이 고상함이 '나 미술 좀 볼 줄 알어!'라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나를 동굴의 끝까지 헤쳐나갈 수 있도록 밀어주는 것이다.
유럽의 박물관의 수준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 이외에도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수많은 박물관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장품 수와 시설/관리, 관람객 수 등을 자랑한다.
이런 박물관들은 유럽 각국이 수 백 년 동안 훌륭한 박물관을 유치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이루어낸 노력의 결실이다.
유럽 박물관에서는 유럽 문명의 미술품 이외에 다른 대륙의 미술품을 볼 수 있다는 사치까지 누를 수 있다. (물론 이 사치의 이면에는 제국주의 시절의 약탈과 노획이 큰 역할을 했다.)
빈 미술사 박물관은 과연 유럽 3대 미술관이라는 명성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그리고 그 훌륭함은 작품을 감상하기 전부터 느낄 수 있었다.
넓고 깔끔하게 차려놓은 보관물 센터와 안내 데스크, 세계 각국의 언어를 지원하는 오디오 가이드(유럽 박물관에서 한국어 지원을 찾아보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데 이곳은 다행히 한국어도 있었다!), 그리고 친절한 직원까지. (직원은 내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해 주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위의 사진처럼 전시실에 푹신한 의자가 충분히 비치되어 있어서 언제든 작품을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른 박물관은 의자가 아예 없거나 가뭄에 콩나듯 아주 조금 비치되어 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그 어떤 작품보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피터르 브뤼헐' 의 작품들이었다. 걔 중에서도 '바벨탑'은 과연 흥미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속 바벨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설대로 곧 무너지게 될 바벨탑의 운명을 잘 보여주듯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 어떻게 저렇게 지을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그 앞으로 왕인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높고 귀하신 분이 행차를 하는데 그는 바벨탑이 기울인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인 '피터르 브뤼헐'은 '농민의 브뤼헐'이라고 불릴 정도로 농민 생활을 애정과 유머를 담아서 그려냈다. 역사적 가치 또한 매우 높은 그의 작품에서는 르네상스 시대 농민들의 삶을 맘껏 엿볼 수 있다.
사실 박물관에 전시된 작가 중 이름값만 따지면 렘브란트나 라파엘로가 피터르 브뤼헐보다 더 유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그림은 대게 초상화라든가 신화,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었는데 주제 자체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보고 있으면 '굉장하다! 엄청나다' 라는 느낌을 받지만 동시에 주제가 주제다 보니 진부하고 식상하다라는 느낌 또한 받는다. (어디까지나 미술에 '미'자도 모르는 내 개인적 의견이다.)
내게는 서민들의 실생활을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이 훨씬 흥미롭게 보인 이유이다.
또 하나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얀 브뤼헬'의 작품 '푸른 화병의 꽃들'.
와!! 이 작품을 보고는 정말로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꽃, 과일 등을 소재로 한 정물화는 그동안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이 경이로운 작품은 분명 정물화지만 지금껏 보아온 정물화와는 완전히 달랐다.
수 십 가지 종류의 서로 다른 꽃들이(저 중에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꽃도 있다고 한다.) 화려하게 만개하여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꽃들은 당장이라도 그림에서 튀어나와 그윽한 꽃향기를 내뿜을 거 같은 사실감과 아름다운 색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동안 탄식과 경탄을 내뿜으며 넋 놓고 쳐다보다가 언젠가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면 이 그림의 복사본을 사서 거실에 걸어놓기로 다짐하고 돌아섰다.
빈 미술사 박물관 1층 원형 홀 가운데에 위치한 카페. 세상에 과연 이런 카페가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화려하다.
건축자재나 소재 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이곳은 이탈리아 장인이 정말 한 땀 한 땀 흘려 만든 신발에 수 만 배는 되어보이는 정성과 노력의 결정체같다.
눈을 어디다 두면 좋을지 모를 정도로 바닥부터 벽, 돔까지 하나의 예술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조각품들과 장식들로 가득하다.
일부러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빈 미술사 박물관을 찾아 온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커피 맛은 별다를 게 없다는 걸 알기에 보았다는 걸로 만족하고 서둘러 G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G층에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의 유물과 르네상스 조각이 있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그랬듯 나도 그림들을 먼저 관람하고 이쪽으로 넘어왔다. 그림을 살펴보는데는 이미 두 시간 가까이 걸린 상태였다.
앞서 말했듯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정보 흡입과 눈 충격(?)으로 인해 내 두뇌의 대뇌피질이 더 이상 활동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미술관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빨리 보고 이곳을 나가자!!'
몸과 마음이 오직 출구를 향해 있었지만 내 발걸음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아니, 빠를 수가 없었다. 눈앞에 놓인 유물들을 도무지 쉽게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뭐... 전시된 유물 하나하나가 거의 국보급 아니 세계급 문화유산이다. 동화 속에 나오는 휘황찬란한 금은보화란 표현은 이것들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것들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여기 있는 것들은 단순히 나이가 무진장 많거나 금이나 은 등으로 화려하게 만들어 놓아서 전시된 게 아니다. 유물 하나하나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치 그 분야에서 인류역사상 최고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그야말로 수공예품을 만드는 경지가 유럽 사람들의 표현을 빌려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 연유로 이곳을 뚫고 지나가는 건 예상보다도 더 힘들었고(?) 결국 힘들고 지친 와중에 무려 한 시간이나 더 부지런히 돌아보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 빈에 찾아가면 꼭 찾아보기를 권한다. 미술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볼 게 정말 많다. 더불어 볼 게 많은 만큼 정말 힘들다.
아침 잘 차려먹고 42.195km 풀마라톤 뛴다는 각오로 가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혼자 보기 아까우니까 빈에서 찍은 몇 가지 사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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