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횡단 자전거 여행
- 독일 (2019. 11. 03.)
-------
알프스가 보인다.
이거다! 기존의 계획을 전면 뒤짚어 엎은 이유가 바로 이 알프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지금 보이는 부분은 얼마나 거대할 지 전혀 예측할 수도 없는 웅장한 성의 외벽에 불과하다. 이 성벽 안의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
오늘은 10월 31일 할로윈이다. 독일에서 할로윈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재미난 사실을 알아냈다. 독일에는 매년 4월 23일 '독일 맥주의 날' 이라는 공휴일이 있다. Wow!)
할로윈이 언제인지, 그리고 할로윈이 독일에서 공휴일인지 아닌지 일말의 단서조차 없는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길을 나섰고 슈퍼마켓이 모두 닫혀 있는 걸 보고서야 오늘이 심상치 않은 날임을 깨달았다.
공휴일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냐고?
이에 대해 앞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독일은 공휴일에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그리고 내 수중에는 어제 먹다 남은 빵 쪼가리하고 물밖에 없었다. 그말인즉슨, 오늘 하루 굶어야 한다!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공휴일이라고 해도 작은 상점, 이를테면 마을의 작은 빵집이나 카페는 종종 문을 여는 경우가 있다. 물론 물건 가격은 Aldi와 같은 슈퍼마켓에 비해 더 비쌀 게 분명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오! 신이시여!'
문을 연 카페가 있었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팩 우유 1L와 빵을 한아름 사들고 카페 앞의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안에는 미니 골프장이 조성되어 있어 사람들이 골프를 치고 있었다.
호주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골프라는 스포츠가 이렇게 주변의 잘 정비된 무료 또는 저렴한 시설에 힘 입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잘 녹아든 거 같다.
마침 공원에는 공공 와이파이가 있었고 심지어 조그맣게 설치된 무대장 벽면에는 콘센트까지 있었다.
'이렇게 환상적인 장소가 존재할 줄이야!'
나는 약 두 시간 가까이 와이파이와 무료 충전을 즐기며 '한국의 개고기 식용 문화'에 대해 열심히 찾아봤다. (최근에 우연히 외국매체가 찍은 관련 동영상을 보게 되었고 관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독일 여행의 마지막 마을, 퓌센에 도착했다.
퓌센에 온 이유는 단 하나이다. 디즈니 성의 모태가 되었다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보기 위함이다.
포르겐(Forggensee) 호수에 들어서자 호수 반대편의 하얀 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꿈에 그리던 노이슈반슈타인 성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화 'ET'처럼 자전거로 붕 떠올라 호수를 가로질러서 최단거리로 성을 향해 날라가고 싶었다. 내가 죽을 때 쯤이나 이런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ㅠ.ㅠ
어쨌든 흥분과 희열을 가슴 가득 안고 페달을 힘차게 밟아 나아갔다. 항상 눈앞에 목적지가 나타나면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휩싸인다. 이 순간을 위해 그 먼 길을 내 두 발로만 달려온 셈이니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테다.
성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도착하니 시침은 어느새 숫자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중에 길을 잠깐 잃기도 하고 아름다운 포르겐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으면서 오느라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지고 말았다.
이곳에 온 관광객들이 꼭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마리엔 다리'이다. 마리엔 다리 위에서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늦게 도착하면 인산인해로 발 디딜 틈이 없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던지라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입구를 지나치고 조금 더 올라가자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호엔슈바가우 성의 입장권을 사기 위한, 엄청나게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했다. 보아하니 입장권을 사기까지 족히 한 시간은 걸릴 거 같은 긴 줄이다. 한쪽에는 성으로 올라가는 마차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해 보이는 말들 밑으로는 말똥이 가득했다.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양갈래 길이 나타났다.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은 한눈에 보아도 굉장히 가파른 길이었다. 돌이라도 굴러 떨어지면 절대 멈출 일 없이 지옥 끝까지도 떨어질 정도의 가파른 경사였다.
표지판을 보자 마리엔다리라고 써있었다. 경사로 보나 표지판으로 보나 지름길이 분명했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친구로 보이는 두 명의 여자, 젊은 커플, 엄마와 딸로 보이는 흑인 가족이 전부였다.
나는 부지런힌 발걸음을 돌려가며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이 모든 사람들을 추월했다. 어차피 혼자 여행하는 내게 '목적지로 향해 나아가는 일' 말고는 딱히 생각할 일도 할 일도 없었다.
이렇게 15분 정도 부지런히 올라가자 성을 경유해서 올라오는 기존의 길과의 합류 지점이 나왔다.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 길을 통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바로 위의 공터에 설치된 정자로 급히 달려간다. 목적지를 앞에 두고 갑자기 내리는 애꿎은 비를 탓할 만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정은 싱글벙글하다. 날씨가 좋든 말든 어쨌든 여행은 즐거운 법이다.
마리엔 다리에 도착했다. 다리 위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미어 터질 수준은 아니었다.
다리는 철제 구조물 위에 나무 판자를 덧대어 만들어져 있었는데 여기저기 약간씩 파손된 나무 판자가 왠지 불안해 보였다. 다리는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워낙 높이가 높이인지라 아니나 다를까 나는 곧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나는 심각한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고소공포증이 없는 사람이 있겠냐만은 내 경우는 그 정도가 꽤나 심하다. 비행기를 이미 수없이 타 보았기에 적응이 될 만도 한데 어째 타면 탈수록 더 무섭다. 이착륙은 물론이거니와 난기류에 비행기가 상공에서 조금이라도 흔들릴라치면 온갖 공포스러운 상상이 나를 괴롭게 한다. 살면서 수도 없이 추락하는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꿈을 꾼 나이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채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떼가며 다리의 반대편으로 나아가던 순간이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그곳에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서있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백조의 성’이라 불리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깎아내릴 듯한 절벽 위에서 문자 그대로 백조처럼 하얗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디 하나 나무랄데 없이 단아하고 완벽에 가까워 보이는 성을 보면서 디즈니 영화 오프닝에서 수없이 봐온 디즈니 성이 실제보다 못 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성에 한 번 시선을 빼앗기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높은 곳의 불안과 공포는 까맣게 잊은채 한동안 노이슈반슈타인 성만을 빤히 바라보게 되었다.
장기간 유럽여행을 한 탓인지 유럽의 경치에 조금씩 무감각해지던 나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전경은 다시금 여행에 대한 내 열정과 신선함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한동안(정말로 오랫동안) 넋 놓고 성을 바라보며 같은 사진만 정말 수 십 장을 찍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 큰 흥분에 휩싸인 거 같았다.
으레 그렇듯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인생샷'을 찍기에 바빴고 몇몇 커플들은 다리 한복판에서 이 성이 그들의 사랑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불타오르게라도 한 것처럼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걔 중에서 필연적으로 두 명의 여자 한국인 관광객의 말이 내 귀에 들어왔다.
"와... 장난 아니네. 오늘 할 일은 다 한 거 같아."
생각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던 퓌센 구시가지를 둘러보고 난 후 길을 나서자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그럼 그렇지~'
예전 같았으면 요즘 날씨를 둘러싼 내 끔찍이도 불행한 운을 저주했겠지만 이제는 어느정도 마음을 놓았다. 흐린 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퓌센시를 벗어나자 곧 크리스털처럼 맑은 호수가 나타났다. 이제는 완전히 맑게 갠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알프스 산맥이 호수의 표면에 반사되어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호수에 조성된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아이들의 부모들은 벤치에 앉아 서로 한가롭게 대화를 나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있는 내게 그들처럼 한가롭게 앉아서 수다를 떨 시간은 없었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에 매혹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와중에도 수없이 뒤를 돌아보며 탄성을 질러댔다.
다시는 못 볼 지도 모르는 풍경이라는 생각을 하면 뒤를 돌아보는 게 조금은 귀찮을지 언정 결코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독일 Again - 뮌헨, 추위에서 해방? (0) | 2020.06.13 |
---|---|
[체코 - 오스트리아 - 독일] - '하루 만에 3개국 지나가기' 그리고 '코젤 맥주' (0) | 2020.06.12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