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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 오~ 나의 동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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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횡단 자전거여행 - 체코, 또 다른 대륙횡단 자전거 여행자 (2019.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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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에서 떠나는 날, 날씨가 정말 말도 안되게 좋았다. 한 주 가까이 하늘을 뒤덮었던 뿌연 구름이 말끔히 걷히고 이보다 더 깨끗할 수 없는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여행지의 날씨만큼은 시진핑이나 트럼프가 온마음을 다해 서로 힘을 합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그야말로 신의 뜻이다.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프라하 성과 블타바 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달리는 중 무언가를 발견했다. 세계음식축제였다! 

 

 천막마다 독일 음식, 프랑스 음식, 터키 음식 등 서로 다른 세계 각지의 음식을 팔고 있었다. 음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내 코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흡족한 표정은 내 눈을 미치게 했다. 

 

 자전거를 세우고 잠시 둘러볼까 했지만 마음을 접어야 했다. 오후 늦게 출발했기에 약간 시간에 쫓기고 있었고 무엇보다 돈이 없었다. 바로 전 날 프라하에서 일어난 비극, 빌어먹을 벌금과 팁 때문에(궁금하면 예전 글 참조) 너무 많은 돈을 써버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루만 더 일찍 열지....' 

 

 이거다! 한 시간의 클릭질과 드래그질 끝에 마침내 인터넷 쇼핑몰에서 마음에 드는 상품을 발견했는데 매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나를 안 좋아하고 관심이 일도 없는 그 여자의 친구가 나를 좋아한다.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여행을 실행에 옮기려는 찰나 환율이 폭등한다.

 

 참 인생이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고 때때로 묘하게 흘러가서 재밌다. 

 

 30년 인생을 살면서 '이 도로에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진심으로 느낀 적이 딱 한 번 있다. 

 

 필리핀의 바기오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때였다. 

 

 휴일을 맞아 바기오 근처의 해발 1500m Mt.Ulap을 찾았다. 운이 좋게도 시내에서 해발 1000m 고지까지 올라가는 지프니(필리핀 대중버스)가 있었다. 지프니 안에서 편안하게 경치를 구경할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산의 4부능선 쯤 올라갔을 때였다. 산길의 도로폭이 급격히 좁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지프니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졌다.

 

 창문 밖으로 밑바닥을 보자 지프니와 낭떨어지 사이의 간격이 정말로 개미 한 마리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저 밑은 이미 천길 낭떨어지였고 꼬불꼬불한 길은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두려움과 당혹감에 사로잡혀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른 현지인 승객들은 누구 한 명 동요하지 않는다. 이게 그냥 일상인가 보다. 

 

 나는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약간의 위안을 받았지만 (일상이라는 건 그만큼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일테니)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건 모두가 꼭 염두해 두어야 할 사실이었다. 

 

 '버스 운전 아저씨가 일초만 졸아도, 핸들을 약 5cm만 삐끗해도 우리는 사이좋게 다같이 하늘나라행이다~'

 

 그때는 어찌어찌 무사히 목숨을 건졌지만 이번은 과연 어떨까?

 

 프라하에서 벗어나고 얼마 안되어 이차선 산길이 나왔다. 도로폭이 좁은 일반국도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차들과 트럭이 지나다닌다. 도로는 산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좁아졌고 곧 내 생명줄과도 같은 갓길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사실 유럽에서 갓길이 매우 좁거나 아예 없는 도로를 여러 번 달려왔지만 그런 길은 대체로 한산한 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산길인데도 불구하고, 도로폭이 매우 좁은 이차선인데도 불구하고 차량통행량이 엄청나다! 무엇보다도 빌어먹을 트럭이 빈번히 지나다닌다. 

 

 가장 큰 곤란은 오르막길을 달릴 때였다. 오르막길에서는 아무래도 기를 쓰고 페달을 밟다 보니 균형이 무너져 좌우로 조금씩 때로는 좀 크게 흔들릴 때가 있다.

 

 자전거가 좌우로 크게 흔들릴 때 좀 부주의한 대형트럭이라도 지나가게 된다면 나는 꼼짝없이 저승사자와 악수할 형편이었다.    

       

 한 7km 남짓한 산길을 한 시간에 걸쳐 지나가며 아찔했던 순간이 몇 번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정말로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뒤에서 굉음이 들려올 때마다 잠시 자전거를 멈췄다가 차를 보내고 다시 열심히 달리고를 반복했다. 불안과 우려가 내 마음을 지배했지만 딱 한 가지 위안으로 삼을 만한 게 있었다.

 

 '자전거 여행 하다가 차에 치여 죽은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나는 괜찮을 것이다! 자전거 여행 하다가 최초로 차에 치여 죽는 사람이 될 게 아니라면! 

 

 '데이비드'는 이번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만난 대륙횡단 자전거 여행자였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많은 유럽인들이 그러하듯 방콕까지 가는 게 목표란다.

 

 길 한 켠에 멈춰있는 그를 발견하는데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온갖 잡동사니가 주렁주렁 달려서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자전거는 밤바다의 등대처럼 놓칠래야 놓칠 수가 없다. 

 

 우리는 모든 장거리 자전거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먼저 서로의 자전거와 짐 구성, 그리고 지나온 경로와 앞으로 갈 경로에 대해서 물어보는 걸로 대화를 시작했다. 

 

 하위문화? Cult? Subculture? 

 

 아무래도 좋다. 장거리 자전거 여행자끼리는 통하는 게 있다. 전 세계 장거리 자전거 여행자를 모두 한 자리에 불러모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강력한 유대감으로 뭉친 '신흥종교'가 탄생할 거라고 장담한다.

 

 그 '신흥종교'의 신자 자격을 완벽히 갖추고 있던 데이비드와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우리는 오늘 하루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해가 저물고 있었기에 우리는 캠프할 장소를 찾아나섰다. 현지 사정에 밝은(?), 유럽인 데이비드가 자신있게 앞장섰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캠핑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좌우를 요리조리 살피는 요상한 모습이 평소 해질녘의 내 모습이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 깊지 않은 숲 속에 텐트를 친 다음 우리는 방금 마트에서 산 음식들로 저녁을 간단히 해치웠다. 그 후 우리는 땅거미가 완전히 가라앉은 고요한 숲 속에 앉아, 작은 손전등이 발하는 희미한 불빛에 의지한 채 올빼미 우는 듯 은밀히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26살 데이비드는 나와 공통점이 많았다. 일단 우리 둘 다 워킹홀리데이를 두 번이나 갔다 왔다. 그는 캐나다와 호주로, 나는 일본과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다. 우리 모두 축구를 좋아했고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친구와 노르웨이에서 자전거 여행을 시작해서 현재 반 년 째 여행 중이고 친구와는 경로 상의 문제로 잠시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나처럼 세상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서 여행에 나섰다고 했다.

 

 우리는 밤이 깊어가도록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 '스폰서'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내 관심을 끌었다. 

 

 데이비드와 그의 친구는 여행을 계획하면서 여행을 지원해 줄 스폰서를 구해 보기로 한다. 그들은 시내 매장을 돌아다니며 '우리 여행을 지원해주지 않을래?'라며 물어봤다. 그리고 그 결과, 예상했던 것보다 더 폭넓은 지원(옷, 모자, 캠핑용품 할인 등)을 받을 수 있었고 당연히 이런 지원은 금전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나도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스폰서에 대해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폰서에 대한 장단점을 알아보다가 결국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마음을 접어버렸다.

 

 '그만한 가치가 없어' 라는게 겉으로 들어난 이유였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가 게으르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모든 일을 나 혼자서, 내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낼려고 노력해 왔다. 헌데 세월이 지나보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 방법은 결코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효율적인 것도 아니라는 걸. 어쩌면 가장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것.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주변에 널리 알리는 일. 더불어 정당한 도움과 지원을 요청하는 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이 있고 그 일이 옳다는 확신이 있다면 이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군가 나를 지원해 주고 있다는 걸 느낄 때 더 강해진다. 더 큰 동기부여가 되고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도 커진다. 

 

 데이비드 본인은 별 일 아니라는 듯 겸손한 태도를 보였지만 나는 그 일이 얼마나 굉장한 일이었는지 알기에 마음 속으로 그에게 큰 박수와 찬사를 보냈다.  

 

 그 날 밤은 정말로 오랜만에 곰이 쿵쿵거리며 내 옆을 지나간대도 모를 정도로 꿀잠을 잤다.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큰 안식과 위안이 된 것이다. 마치 그 옛날 홋카이도에 상륙한 첫 날, 배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와 한 텐트에서 같이 잤을 때처럼 말이다. 

 

 

 다음 날 데이비드를 따라 산 위에 자리잡은 백작(공작? 남작? 자작?)의 성을 보러 갔다. 

 

 20km 정도 데이비드의 꽁무니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가는데 점차 힘이 부쳐왔다. 

 

 나는 하루에 보통 60km씩 자전거를 탄다.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쉬고, 두 시간마다 경치 좋은 곳에 주저앉아 밥이나 간식을 먹고 책을 본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텐트를 피고 눕는다. 장담컨데 나보다 느린 자전거 여행자는 좀처럼 찾기 힘들거다.

 

 그래 왔는데 갑자기 휴식 없이 꽤나 빠른 속도로 20km를 달리자니 죽을 맛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데이비드에게 잠깐 쉬었다가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쉬어가자는 말을 꺼내는 순간, (안 그럴 거라는 걸 알지만) 데이비드가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일 거 같았다.

 

 '나는 아직 20대이고 너는 30대이니까. 한국인보다는 이탈리아 사람이 더 튼튼하고 강하니까.'

 

 '야!!! 좀 쉬다 가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을 때 다행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데이비드는 드론을 가지고 있었다. 드론을 이용해서 하늘에서 전경 사진을 찍는 걸 즐긴다고 한다. 드론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난생 처음인지라 꽤나 신기했다. 주변의 관광객들도 나와 같은지 다들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일을 마치고 우리는 성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는 어제 밤에 나와 스쳐지나가 듯이 했던 약속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나한테 네 기타 연주 보여줄 거야?"

 "그럼 물론이지! 어제 약속했잖아."

 

 성 뒤로 자리잡은 작은 호수를 따라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산책로를 걷다 보니 넓고 한적한 공터가 나타났고 우리는 공터 벤치에 앉았다. 

 

 데이비드는 기타를 꺼내서 기타줄을 몇 번 튕기더니연주를 시작했다

 

 누군가 오직 나만을 위해 기타 연주를 해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나는 마치 잘생긴 소년을 마주한 소녀처럼 들려오는 선율에 가슴이 설레였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기타를 배워왔다고 했다. 과연 기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훌륭한 연주였다. 연주와 함께  노래는 솔직히 말해서 (데이비드 베컴만큼 얇은 목소리 톤 때문인지) 연주만큼 훌륭하진 않았지만 선곡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뜻밖의 라이브 뮤직에 정말로 순수하게 감동했다. 그가 들려주었던 노래 중 이탈리아 인디 밴드의 노래가 특히 좋았다. (슬프게도 제목을 까먹었다. 이런 돌대가리!!! Bonehead!!) 

 

 데이비드의 연주를 들으면서 나도 그처럼 악기를 다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다음악을  알면  여행의 희노애락이 더욱 더 분명하게 피부로 느껴질 거 같았다.  

 

 기타가 없었다면  자전거 여행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데이비드의 말은 내 마음의 큰 파동을 남겼다.

 

 그와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나는 내 오랜 친구와 함께 있는 듯 마음이 편했다영어로 대화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망설임과 부끄러움 없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어쩌다보니 2002 월드컵 한국  이탈리아 경기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다. 누가 이탈리아 사람 아니랄까봐 데이비드는 경기의 불공정성에 대해 불평을 쏟아냈다

 

 예전에 일본인 친구랑 이 주제에 대해 얘기할 때도 '불공정했다!'라며 불만 아닌 불만을 들었는데 과연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경기이긴 했나 보다.  (당연히 나는 한국인으로써 그저 자랑스럽기만 하다ㅎㅎ)

 

 데이비드와 며칠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서로 가고자 하는 길이 달랐기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우리는 마지막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작별 인사 후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바람처럼 쌩하고 가버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에서 왠지 모를 허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얼음공주처럼 돌아선 그의 뒷모습에서 나는 분명 그와 즐겁고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다행히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기 위해 그와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이건  기우에 불과했다는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그는 헤어지는 순간의 어색함과 슬픔을 나만큼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혹은 자전거 여행자들끼리는 흔히들 그러듯, 우리가 언젠가 길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구는 둥글고 우리는 작은 돌 위에 살고 있으니까.

 

 

'사신'이 거주하는 폐건물
시골 버스정류장 안

 '프라하' 에서 '비엔나'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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