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저자: 프란츠 카프카
기타: 단편소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리 잠자'는 영문도 모른채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당혹감을 금치 못 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그레고리는 자신(벌레)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 하는 상황에서도 출근 걱정을 한다.
그레고르의 가족은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걱정과 연민, 그리고 두려움을 품은 채 그를 방 안에 숨기고 돌봐준다.
그레고르의 경제력에 의지해 살아가던 그들은 그레고르가 더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생존을 위해 각자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는 와중 더욱 '벌레화' 되어가는 그레고르와 그를 둘러싼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 간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지고 그에 따라 그레고르에 대한 대우 또한 점점 거칠어진다.
집안에서 불행한 사고가 있던 그 다음 날, 그레고르는 방안에서 사체로 발견되고 가족들은 미련없이, 새 삶에 대한 희망을 품은 채 그레고리를 남겨둔 채 집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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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신'의 도입부는 누구에게나 큰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하다니? SF소설에서조차 영문도 없이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벌레로 변하는 건 본 적이 없다.
충격으로 시작한 소설은 생각 외로 굉장한 설득력을 보여주며 단편소설답게 빠르게 전개된다. 작가가 딱히 의도한 부분도 아닌 거 같지만 '벌레화' 하는 그레고르가 겪는 고충은 내 가슴에 비수를 꽂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왜 그럴까? '벌레'가 된 그레고르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 이야기가 이처럼 강한 설득력과 호소력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변신'이 주는 교훈은, 인터넷에서 본 표현을 빌리자면 '이게 남일 같지?' 로 요약된다.
그말인즉슨, 우리 모두는 언제든 하룻밤 사이에, 아니 한순간에 그레고리처럼 '벌레'로 변할 수 있다. 그리고 일단 벌레로 변하고 나면,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벌레화' 되는 과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레고리가 '벌레화' 되는 과정이다.
1. 인간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
2. 신선한 음식에서 구역질을 느끼고 썩은 음식에서 먹는다는 기쁨을 찾는다.
3. 인간이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벽이나 천장을 기어다니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4. 밝고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탁 트인 공간보다는 음침하고 습기가 찬, 어둠 속의 좁은 공간을 선호하게 된다.
그레고리의 '벌레화' 과정이 심화될수록 그에 비례해서 가족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진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그들 사이에는 한 지붕 아래 산다는 사실과 벌레로 변했을지언정 어쨌든 가족이라는 실오라기 같은 연결고리만이 남을 뿐이다. 하지만 이 실오라기 같은 연결고리마저도 그레고리가 죽고 가족이 집을 떠나면서 여름날의 아지랑이처럼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레고리와 그의 가족을 둘러싼 갈등의 골자는 '소통의 부재' 이다. 이는 위에 언급했듯이 그레고리가 가족들과 함께 살 뿐이지 언어적/비언어적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소통의 부재는 우리 사회의 치유할 수 없는 고질병이 된 지 오래이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사회가 더욱 고도화되어 갈수록 그리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우리는 세상 반대편의 있는 사람과도 손쉽게, 그것도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정작 내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모른다.
사실 옆집에 관심을 갖는 건 양반이나 하는 짓이다. 심지어는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 구성원이 요즘 뭐하면서 살고 있는지 모를 때도 많다. 반면에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나랑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의 생활은 내 손바닥만큼이나 속속들이 알고 있다.
소통의 부재는 인간 소외로 귀결된다. 그레고르의 '벌레화'는 결국 소통의 부재에 몸사리를 앓고 있는, 그리고 그에 따라 처절한 소외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빗대어 보여준다.
현대판 '벌레화'의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1. 게임이나 채팅 등 가상세계에 빠진다.
2. 밤낮이 바뀌고 라면이나 빵과 우유, 찬밥과 김치찌개 등 간편식으로 대충 혼자 식사를 때우게 된다. 이에 따라 가족과의 접촉이 줄어든다.
3. 불규칙한 습관으로 행동과 태도가 예민해지고 거칠어지며 방구석에만 틀어박힌다.
4. 가족들은 그런 모습에 점점 지쳐서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서로 간의 소통은 단절된다.
1. 친구들은 하나둘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에 계속해서 공무원 시험에 낙방한다.
2. 주머니에 돈은 없고, 절박함과 부끄러움, 초라함에 친구가 불러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3. 만사에 싫증이 나기 시작하며 누구의 위로나 격려도 듣기 싫어진다.
4. 한동안 연락이 뜸해지자 친구들도 하나둘씩 등을 돌려 제 갈길을 가기 시작하고 더욱 더 외톨이가 되어 버린다.
1. 세상의 풍파에 휩쓸리면서 열심히 살아오다 보니 어느새 흰머리가 지긋한, 허리 굽은 노인이 되었다.
2.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나고 흥청망청 산 것도 아닌데 수중에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다.
3. 쉰내나는 노인네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일도 없고 타인과의 접촉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4. 뭔가 새로운 취미나 소일거리를 찾아보려고 해도 이제와서 기존의 삶의 방식을 바꾸기란 쉽지 않고 사회로부터 결국 점점 도태되어 간다.
1. 큰 사고로 인해 남은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
2. '장애인'이란 꼬리표는 취업활동은 물론이거니와 사교활동, 취미활동 모든 부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3. 사회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매몰되고 결국에는 잊혀져가는 자신의 처지에 자존감을 잃어간다.
4. 누구보다 활달하던 본인의 옛 흔적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음침하고 그늘진 음지에 살아가는 나를 발견한다.
이 모두가 현대판 '벌레화' 과정이다. '벌레화'를 초래하는 불행한 계기는 게임 중독이라든 불의의 사고, 한순간 무너져 버린 건강, 돌이킬 수 없는 나이, 취업난 등 그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계기는 가지각색이라도 과정과 결말은 모두 입이라도 맞춘 듯 일관성을 보인다. 그 일관성이라는 건 즉, 과정에서 '소통의 부재' 를 겪게 되고 결국에는 '더 고립, 더 외톨이'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 악순환은 '죄수의 딜레마'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끔찍한 파멸 또는 좋지 못한 꼴로 끝이 난다.
'벌레화'의 가능성이 단순히 개인의 범주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다. '벌레화'는 폭넓은 의미로 가족 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서 일어날 수 있다.
직장인과 백수, 부자와 거지, 젊은이와 노인, 비(非)장애인과 장애인, 시민권자와 난민,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자유롭고 개방적인 아들 등 서로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이들 사이에는 교집합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냉전시대 베를린 장벽보다 더 높고 두터운 벽이 있을 뿐이다.
이 관계에서 어느 한 쪽을 무작정 '벌레'로 칭하는 건 어불성설이겠지만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상 '백수, 거지, 노인, 장애인, 난민' 등이 '벌레'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렇다고 했을 때, 위의 극과 극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행태와 태도가 '벌레화'를 겪는 그레고리와 그를 둘러싼 가족 관계와 무엇이 다를까?
예를 들면 부자가 '벌레'인 거지에게 보이는 무시, 경멸, 핍박과 거지가 부자에게 보이는 굶주림, 동경, 나태, 피해의식 등은 그레고리와 그의 가족이 서로에게 보이는 반응과 일치한다.
이 두 계층 간에는 '소통의 부재' 만이 존재할 뿐이고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벌레'의 입장인 거지는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 앞서 언급한 예는 '소통의 부재'라기 보다는 '계층 또는 신분 간의 갈등'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19, 20세기, 흔히들 말하는 혁명의 시대에는 이렇게 계층 또는 신분 간의 이해관계의 차이는 갈등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단어가 구시대 유물처럼 되어버린, 안정된 현대사회에서 두 극과 극의 관계 속에는 사실 갈등따위는 없다. 그저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강자에 의한 강압적인 소통 부재 그리고 차별, 소외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불어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끼리, 사회적 약자들끼리 사이좋게 뭉치기라도 했지만 '돈'이 지배하는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가난하다고 더럽다고 수준이 안 맞는다고 무시하고 경멸할 뿐이다. 여기서 또 '벌레' 들끼리의 소통 부재 그리고 소외가 발생한다.
혹자는 '나는 백수도 거지도 노인도 장애인도 난민도 아니다. 나는 벌레가 아니다!' 라고 외치며 남일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범하게 보이는 우리들 삶에는 한순간 그레고리처럼 '벌레화'를 겪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삶의 주기에 따라 발생하는 필연적인 위기 또는 변화와 더불어 현대사회는 개개인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만큼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이 불행한 계기라는 건 언제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순간 백수가 되거나 (구조조정, 경제위기,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 창궐)
거지가 될 수 있고 (사업실패, 갑작스러운 중(重)병 발병, 천재지변)
장애인이 되거나 (교통사고, 유전병, 낙상 등 불운한 사고)
심지어는 난민이 될 위험도 있다. (전쟁의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고 급격한 기후변화 속에 사는 우리 모두는 사실 잠재적 난민이다.)
특히나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빌어먹을 '돈'이라는 놈 때문에 거의 항상 '벌레'가 될 위험에 처해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돈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사람들은 돈이 없다면 차라리 그냥 목 매달아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돈이 없으면 친구, 이웃, 사회와 소통을 하려고 해도 문 뒤에서는 냉소와 무시만이 돌아올 뿐이다. 심지어는 피를 나눈 가족과도 돈 때문에 과거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싸늘하고 탈출구 없는 정적만이 흐른다.
그레고리가 벌레로 변한 직후, 그 무엇보다도 먼저 출근 걱정을 한 건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못 벌게 된다면 그건 곧 가족과의 소통 부재로 이어질 거라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인류는 산업혁명과 과학혁명, 그리고 제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표면상으로는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발전된 사회를 이룩해 내었다.
그에 힘입어 세계인구는 최근 백 년 사이에 4배나 늘어나 지구가 좁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사람들은 저 추운 시베리아 동토에도 그리고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지대에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극건조지대에도 맹수와 온갖 치명적인 독으로 무장한 파충류들이 살아가는 밀림에도 살고 있다.
즉, 풍족과 번영의 시대 속에서 인간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여가 시간의 축복을 누비고 있고, 우리 주변에는 길거리 돌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왜 우리는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소외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신의 존재를 망각한 사람들?
내게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 따위는 없다.
차라리 물질적으로 생활이 곤궁하더라도 다같이 어렵지만 함께 서로 도우며 살아가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웃집은 물론이거니와 동네 전체가 하나의 가족과도 같은 시골에 가서(아직 그런 시골이 존재한다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 눈에는 가난하지만 여전히 옛날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서로 돕고 사는 중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남미 사람들의 삶이 더 즐거워 보인다. 그들이 보여주는 미소가 우리의 그것보다 더 밝고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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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놓칠세라 걱정해야 하고 맛없는 식사도 제때에 먹기가 힘들뿐만 아니라 상대하는 사람이 늘 바뀌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친근한 인간관계를 한 번도 맺을 수가 없어. 정말 빌어먹을 짓이지.
차라리 아프다고 하면 어떨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척 창피한 일일 뿐만 아니라 의심만 살 것이 뻔하다. 그레고르는 5년간 근무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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