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용소군도 -
저자: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기타: 전 6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
정말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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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나 작품의 배경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대표 작품이니만큼 '위키백과'나 '나무위키'에만 가도 이에 대한 설명은 아주 자세히 서술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언제나처럼 독후감을 쓰기에 앞서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과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자 다른 사람들이 쓴 독후감을 검색해 보았다. 생각보다 관련된 글이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책 자체를 읽지 않은 걸까? 아니면 책은 읽었는데 독후감을 쓰지 않은 걸까? 어느 쪽이던 간에 작가나 작품의 명성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 이데올로기(이념)을 둘러싼 고리타분한 정치 소설이라는 작품의 이미지가 적잖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더욱이 전 6권의 엄청난 분량은 14-15 시즌 '바르셀로나'의 압박축구보다 더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는 정신 나간(?) 현대 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읽는 게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데 있어서 일말의 망설임도 필요 없었다.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친다!'
사실 나도 전 6권을 다 읽은 건 아니다. 빙산의 일각이라 할 수 있는 '김학수 옮김'의 요약본을 읽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처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은 정말 정말 정말 흥미롭기 때문이다!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면 전 6권을 찬찬히 읽어볼 예정이다.)
정치 소설이지만 결코 고리타분하지 않다. 작가는 몸소 느낀 자신의 처절한 실제 경험과 철저한 고증을(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 통해 글을 썼다. 그 때문에 책은 켄 번스 감독의 '다큐멘터리'를 보듯 아주 신선하고 흥미로워서 술술 읽힌다.
또한 체포, 재판, 심문, 숙청 등 무겁고 어려운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작가 특유의 힘 있고 생동감 넘치는 필력과 재치로 인해 때로는 코미디를 보듯 우습고 재밌기까지 한다.
저자는 제 2차 세계대전을 맞아 소련군의 장교로 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스탈린을 '콧수염 남자'라고 우습게 풍자했다는 이유로 8년형을 언도받는다.
누가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체포의 이유였다. (게다가 무려 8년형!)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이 체포가 없었다면 어쩌면 '수용소군도' 라는 대작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수 십 년 동안 꾸준히 이어진 숙청의 '흐름'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체포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한동안 독후감을 잘 써내려 가다가 어느 순간 사방팔방이 꽉 막힌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 글을 써가야 하는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이유를 알아내고자 써내렸던 글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그러자 곧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작가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 지난 일을 회고하며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 작가의 한 문장 한 문장에는 작가 본인의 풍부한 생각과 솔직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 그 시대에 대한 내 생각과 감상이 되었다.
작가의 생각과 감상을 초월한 무언가를 쓸 지식이 내게는 없었다. 한 국가의 실체를 두더지가 땅 구멍을 파듯 철저하게 헤집어 낸 작가의 빛나는 통찰력과 굳은 의지 앞에서 나는 그의 말을 곱씹어서 생각해 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용소군도'에 지낸 사람들의 자세한 생활상을 보았으면 그래도 몇 마디 진득하게 끄적이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말로는 수용소 생활이 자세하게 묘사된 전 6권을 다 읽었으면.)
극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희로애락과 의지, 신념 등이란 언제나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 내면의 속삭임은 나 자신도 항상 내면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인간이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온몸으로 느끼고 공감하는 바가 크다. 이는 곧 나만의 고유한 감상평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김학수 옮김'의 요약본에는 '체포-신문-재판'의 과정에 많은 페이지를 할당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인 구 소련의 대대적인 통제 아래 행해진 이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운 만행에 나는 정말 순수하게 놀랐다.
구 소련의 이 부조리한 정치 체제를 우리나라의 정치 체제와 비교하기에는 좀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둘은 분명 '정치'라는 같은 범주에 속해 있지만 동시에 '침팬지'와 '인간'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구 소련의 행정/사법 시스템은 허울만 비슷할 뿐이지 그 실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거 같은, 완벽한 신선함과 기발함 그리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와 통치자의 우매함으로 점철된 아주 독창적이고 새로운 제도였다!
쓸데없는 말이 길어졌다.
결론은 작품에 대한 내 순수한 감상을 쓰는 것보다는 작품 속의 내용을 최대한 인용하면서 작품의 무게와 가치를 다시 곱씹어 보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당시 이데올로기 속에 가려진 구 소련 정치 체제의 잔혹함과 부조리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나중에 관련된 독후감을 쓸 때 내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주는 큰 자산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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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에 묘사된 구 소련은 온갖 모순과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이었다.
20세기 초중반, 구 소련의 정치 지배자들은 신조차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이데올로기(공산주의)와 법률 제 58조를 등에 업고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이들은 불순분자들을(대부분 무고한 사람들) 마치 거대한 그물로 온갖 어종을 대량으로 쓸어 담는 트롤어업처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너나 할 거 없이 깡그리 잡아들였다.
이러한 만행은 때로는 '흐름' (정해진 특정 조건에 합당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임)을 타고 구 소련을 초대형 태풍처럼 휩쓸었다.
사람들은 온갖 얼토당토 한 이유로 체포를 당했다.
서양 음악을 들었다고 체포되었다. 차값을 지불했다고 체포되었다.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체포되었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돈을 너무 많이 벌었다고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는 무소불위의 강력한 권력 기관인 '푸른 제모'의 눈물나는 노력이 있었다. '푸른 제모'의 기관원들은 자신들의 모든 역량과 상상력을 오직 무고한 사람들의 체포 구실을 만드는 데 쏟아붓는다.
구실을 만드는 데도 한계가 있었는지 마침내 잡은 사람은 왜 체포를 했는지, 잡혀온 사람은 왜 체포를 당했는지 모르는 상황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신문관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뭘 하고 있었소?"
"기술자였습니다."
"기술자로서 당신이 하던 일을 설명해 주시오."
체포를 해놓고 신문관은 가만히 앉아 펜이나 빙글빙글 돌리고 있고 피의자가 요목조목 자신의 평소 생활을 들려주는 웃기지도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신문관은 상대방의 이야기에서 꼬투리를 잡아내 빈 깡통 버리듯 (무고한) 죄인을 감방에 처넣는다.
이 시절 구 소련의 행정/사법 시스템은 겉으로는 구색을 잘 갖추고 있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반 세기 전 러시아 제정시대 보다도 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법률 제58조의 확대해석은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저 시베리아의 극지방에서 몰래 살아가는 게 아닌 이상 그 누구라도 초인적인 힘을 가진 이 법률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체포를 당할 수 있었다.
일단 체포를 당하고 나면 사건은 이미 99% 종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체포된 사람이 풀려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형식 상 체포되어 온 사람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 했다. 아니 안다고 할 지라도 결코 이를 현실로 옮기지 못했다.
왜?
'푸른 제모'의 신문관들은 이미 법률을 초월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일이 조금이라도 복잡해져서 자신들의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신문관이나 검사는 왜 체포를 했는지 여러 가지 증거를 가지고 합리적이고 조리 있게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체포당한 사람이 자기가 왜 유죄가 아닌지 스스로 증명하기를!
자력으로 스스로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온갖 기상천외한 고문 앞에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고문을 포함한 신문의 요점은 어떠한 개인도 결국에는 굴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과 기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와 모든 걸 가진 사 사이에 협상이나 줄다리기 따위는 없다. 온갖 끔찍하고 잔인하고 괴로운 신문 및 고문 방법 앞에 신문관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인체의 털구멍에서 피가 스며 나올 때까지 찜통 감방 안에 갇혀 있었다.]
[감옥의 의사는 신문관의 훌륭한 조수이다. 모진 고문 끝에 기절했다가 퍼뜩 정신이 들면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더 때려도 됩니다. 맥박은 정상입니다."]
한 평범한 인간이 짐승도 아닌 자기와 똑같은 다른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결코 쉽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절망하고 애걸하고 영혼을 담아 용서와 자비를 구한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벼랑 끝에서 지푸라기, 아니 결코 잡을 수 없는 바람조차 잡으려고 애를 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푸른 제모'의 기관원들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와 이데올로기(공산주의)라는 미명 아래 그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흡사 로봇과도 같은 인간이었다. 즉, 이데올로기라는 실체 없는 유령이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송두리째 집어삼켜 버린 것이다.
앞서 말했듯 구 소련의 행정/사법 시스템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정도로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다. 걔 중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건 미결수가 재판을 받기 전부터 판결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리가 없는 미결수들은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촛불만큼 희미하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재판에 섰다.
재판은 당연히 차마 일 분이 걸리지 않고 끝났다. 재판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애꿎은 의사봉을 두드리며 형을 언도하는 일 뿐이었다. 미결수들은 절망했다. 반면 재판관들은 재판을 위해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었기에 이에 열렬히 환호했다.
저자는 '할당량'(노르마)라는 단어를 쓴다.
스탈린은 그곳이 어디건 간에 도시에서도 부대에서도 적이 갑자기 없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나온 개념이 바로 '할당량'이다.
'할당량'이란 무엇인가? '할당량'이란 곧 스트레스이다.
스스로 정한 할당량이던 외부의 압력으로 정해진 할당량이던 채우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거나 누군가의 질타와 비난을 받는다.
절대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스탈린의 명령에 의한 할당량은 '꾸란이냐 칼이냐'와 비슷한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말인즉슨 모 아니면 도, '채우지 못 하면 네가 할당량에 포함된다!'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푸른 제모'의 기관원들은 구 소련의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대가리를 굴리고 발품을 팔아가며 죄없는 사람들을 감방에 처넣었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기관원들의 모습은 우스워서 폭소를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안 그래도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 처넣고 있는 상황에서 이 '할당량'이란 것 때문에 더욱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최고형이 존재하지 않는, 심장이 쫄깃한 사법 체제 아래 그들은 최소 8년 이상의 형을 언도받았다.
무고하게 체포당한 계급(또는 신분) 중 가장 불쌍한 건 '전쟁포로'와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던 '반복 숙청'의 피해자였다.
우선 '전쟁포로'에 관해서 얘기해 보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군(또는 추축국)'에 잡혀 있던 포로들은 '이제 다 끝났다'라는 안심과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고국으로 귀환했다.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고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다'라는 조국으로부터의 예기치도 않은 청천벽력과 같은 잔인한 선고였다. 귀환하자마자 그들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구 소련(공산주의)에 잠재적 위협이 되는 불순분자'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희대의 편집증 환자 '스탈린'의 의심과 불신은 조국을 위해 용감히 싸우다 적군에게 잡힌 전쟁포로에게조차 예외가 없었다.
그는 구 소련의 전쟁포로가 서방세계(자본주의 세계)에 구속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서방세계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언젠가 구 소련 체제에 크나큰 잠재적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가, 추축국의 아주 열약한 포로 처우를 견딘 인고의 시간에 대한(당시 구 소련은 포로 처우 조항을 다룬 '제네바 협약'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보답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지 알고 있던 전쟁포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전쟁포로는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고국으로 귀환하자마자 다같이 공평하고 사이좋게(?) 체포되었다.
[반복 숙청에 대한 내용은 따로 적어둔 메모가 없어서 생략ㅠ.ㅠ 엄청나게 흥미로운 내용 중 하나였는데 아쉽다...]
구 소련은 역사상 가장 큰 국가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은 죄수들의 규모는 당연히 죄수 수용시설에 엄청난 과부하를 초래했다. 25인용 표준 감방에 140명의 죄수들이 생활할 정도였다.
저자는 스스로가 고백했듯 운 좋게 아주 럭셔리한 수용 시설에 보내졌다. 덕분에 그는 편안하게(?) 책도 읽고 같은 방 죄수들과 수다도 떨어가며 감방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초창기에는. 요약본이라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까지가 요약본의 전부이다.
주제가 주제이다 보니 배경지식의 부족함으로 인해 다소 따분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더 떨어져가는 내 빌어먹을 집중력도 여기에 한몫 단단히 했다.
하지만 책 구석구석에 녹아든 작가의 기지와 재치는 이제껏 보지 못 한 정말로 특출한 것이었다.
저자는 선사시대 이후의 개념인 역사, 정치, 이념 등을 선사시대 이전의 개념인 인간의 본성, 신념, 의지, 고난 등과 마법처럼 적절히 조화시켰다. 그 결과 '수용소군도'는 교육적인 요소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나라의 막장 드라마에서 볼 법한 흥미로운 요소가 책을 다채롭게 만든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
'수용소군도'는 출판 이후 꽤 오랫동안 러시아 내에서 불온서적이었다. '솔제니친' 자신은 이 책을 출판한 이후 국가반역죄로 1974년부터 94년까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데 현재는 '솔제니친' 부인의 노력 덕분에 불온서적이라는 불명예 딱지를 넘어 러시아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렸다고 한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다. 다만, 이 진실이란 결코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진실이 밝혀지기까지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재치와 구 소련의 부조리를 잘 보여준 책의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여기서 폭소를 터뜨렸다. 보면 볼수록 참 아이러니하게 웃긴 대목이다.
[요즘은 아무도 총살에 처하지 않소. 안심하시오. 아마 10년형 쯤 떨어질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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