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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이스탄불) - 내 마음대로 끼적이는 '이스탄불'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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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 횡단 자전거 여행

- 내 마음대로 끼적이는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 멜랑콜리의 도시 '이스탄불'

(2020. 2. 23 ~ 2020.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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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픽션 작가도, 어떠한 역사적이고 숭고한 임무를 가진 채 이스탄불에 온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도 아니다. 당장 내일 모래를 마지노선으로 삼 년째 몸 담고 있는 시시콜콜한 잡지사에 투고를 해야 하는 상황도, 이제 막 일만 명 정도의 구독자를 돌파하고 콘텐츠 제작에 더욱더 심혈과 박차를 기울이는 유튜버도 아니다.

 

 요점은 내게 있어 '이스탄불'에 관한 나만의 무언가를 창조하는데 있어 아무런 외부적인 압박이나 의무 또는 그에 따른 보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에 관한 글 작성의 구상 단계에서 나는 마치 실체 없는 무언가를 잡는 듯한 모호함과 난해함을 느꼈다. 

 

 이스탄불은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이다.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 '멜랑콜리의 도시', '고양이 왕국',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외에도 수많은 수식어가 존재한다. 그만큼 이스탄불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신선한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사람들의 분주한 삶의 공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터키와 관련된 우리나라에 출판된 그 어떤 책도 결코 '이스탄불'에 대한 언급을 빼먹지 않는다. 이 경향이 워낙 확고한 나머지 어떨 때는 마치 이스탄불이란 도시가 터키의 전부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세계 최초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자 크고 작은 수많은 문명이 자라나고 사라져 간 아나톨리아 반도에 자리 잡은 터키의 역사가 이스탄불이라는 하나의 도시로 치환되거나 설명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역사에서 이스탄불(또는 콘스탄티노플)이 갖는 위치와 상징성은 그야말로 터키 내에서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고 세계적인 관점에서 봐도 매우 중요한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에 '오르한 파묵'의 회고록,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을 읽었다. 노벨상 수상에 빛나는 작가의 두 손에 의해 살아난, 작가에 의하면 오랫동안 이스탄불에서 살지 않는 이상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그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들이 내게도 전해져 왔다.

 

 그리고 내 기대와는 달리 이러한 것들은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실체를 더 명확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를 초래했다. 도시의 실체가 더욱 모호해진 것이다. 마치 안 그래도 어려운 수학 공식에 또 하나의 함수가 추가된 듯한 느낌. 내가 글을 쓰는데 앞서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고 괴로워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이번 글은 삼 주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보냈던 이스탄불에서의 시간 순서 상의 여행기록이 아닌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에 대한 감상을 되먹지 않은 나만의 방식으로 써내려 가려고 한다. 아니, 이 방법이 아니면 이스탄불이란 도시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게 더 옳을 거 같다. 

 

 누구나 쉽게 자신의 발자국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여행지에 대한 정보나 감상을 진술하는 거 보다는 이런 식으로 쓰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이라 느껴진다. 그리고 어차피 여기에 올리는 모든 글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한 글이기도 하니까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 이스탄불이라는 이미지가 처음으로 내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된 순간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줄리아를 만났을 때이다.

 

 이스탄불이라는 지명이 왜 우리의 대화 속에 등장하게 된 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와 여행 얘기를 하다가 등장하게 되었겠지. 자전거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야 하니까. (사실 터키 대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통해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가는 방법도 있다.)

 

 줄리아는 이스탄불, 더 나아가 터키를 여자 혼자서는 결코 가면 안 되는 징그럽고 상스러운 짐승들의 소굴로 묘사했다. 터키의 상(?)남자들은 터키를 혼자 여행하는 외국인 여성을 보면(특히 금발의 여성, 줄리아는 금발이었다.) 섹스를 하고 싶어서 저렇게 혼자 다닌다는 생각을 하고 치근덕거린다는 게(더 나아가 치근덕거려야 한다는 게) 줄리아의 의견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녀가 너무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동안 내가 경험해 온 바에 따르면(터키 남자들에게는 미안하게도) 어느 정도는 동감하는 바이다.

 

 그녀는 덧붙여서 이스탄불을 '멜랑콜리'한 도시라고 표현했다. 그 당시는 '멜랑콜리'라는 단어의 뜻을 잘 알지도 못 했을뿐더러 대체 '멜랑콜리'한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구체적인 감도 오지 않았다. 이스탄불에서 삼 주의 시간을 보내고 관련 서적을 몇 권 끼적여본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도 대체 '멜랑콜리'란게 어떤 것일까라는 물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분명한 건 이스탄불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가보았던 그 어떤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 한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활기가 넘치며 강렬하고 아름다운 동시에 모호하고 비애와 애수의 감정이 깔린, 이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가 세상의 중심처럼 느껴지면서 어딘지 노후화되고 변방의 느낌이 나는 그런 이상하고 신비로운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순간, 나는 벅찬 감격과 환희를 느끼는 동시에 엄청난 스트레스 또한 맛보았다.

 

 아직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한국까지 달려야 할 거리가 무려 15,000km도 넘게 남아 있었지만(애초에 계획했던 총 거리의 1/3 정도밖에 못 온 시점이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왔다는 사실만으로 그리운 고향에 열 배는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의 활력과 분주함 그리고 어디서나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엄청난 인구 밀집도에서 나는 서울에서나 느꼈을 법한 오감을 번뜩이게 만드는 강한 끌림과 힘을 느꼈다.

 

 반면 메트로폴리탄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대혼란(분명 평화로운 산골 마을에 살다가 처음으로 이런 도시에 온 사람들은 대혼란이란 말을 사용할 것이다.)은 자전거를 타고 도심의 외곽에서 중심(파티흐 거리)로 가는 길에 '이대로 차에 치여 죽는 건 아닐까?'하는 시시각각 피부에 와 닿는 우려와 공포를 불러왔다.

 

 이스탄불은 단연 자전거를 타기에는 최악의 도시였다.

 

 이탈리아의 로마처럼 일곱 개의 언덕 위에서 탄생한 이스탄불(옛 비잔티움 지역)은 깎아지른 듯한 언덕이 많아서 자전거 페달을 돌리기는커녕 밀고 가기에도 굉장히 힘이 부칠 때가 많았다.

 

 도로는 오로지 저 흉측한 자동차만을 위해서 설계되어 있었고 운전자들은 그 도로 위가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 듯 돌발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운전을 서슴치 않았다. 나는 고작 한 시간 반 정도 도시를 횡으로 가로지르며 자전거를 탔을 뿐이었는데 내 옆으로 종이 한 장 차이의 간격으로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로 인해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을 몇 번이나 경험해야만 했다.

 

 고물차, 고급차, 화물 트럭, 고속버스, 시내버스, 돌무쉬, 기차, 비행기, 오토바이 등 엔진이 달린 온갖 것들에서 나오는 매연과 1,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뿜어대는 이산화탄소가 뒤죽박죽이 된 탁한 공기를 숨 가쁘게 들이 마시고 있으면 꼭 탈출구 없는 늪에 빠진 거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탁한 공기에 내 신경이 둔탁하고 흐려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흘러내리는 용암처럼 결코 통제할 수 없는 도심의 활력과 분주함 때문인지 난생처음으로 접촉 사고를 냈다. 다행히 운전자도 자동차도 나도 내 자전거도 찰과상이나 흠집 하나 없이 무사했지만 내 평생 처음 벌어진 일에 나는 꽤 충격으로 받았다. (자전거를 누구보다 안전하게 탄다고 장담하는 나였다.)  

 

 '나는 대체 삼 주 동안 이스탄불에서 뭘 했는가?'라는 질문이 언제 다시 돌아갈 지 모르는 이스탄불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질문이다.

 

 나는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구(참르자 언덕 등), '미마르 시난'의 최고의 걸작 쉴레마니예 모스크, 예레바탄 저수조, 골든혼이나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페리 등 많은 것을 놓쳤다. 현지인들과 허심탄회하게 소통을 하며 그들의 문화를 배운 것도 아니고 세계 3대 미식 국가라 불리는 터키의 그 다양하고 훌륭한 음식과 디저트를 시도하거나 즐긴 것도 아니다. (먹은 거라고는 되네르 케밥과 쾨프테 케밥이 전부이다.) 

 

 프랑스의 파리를 생각할 때도 같은 질문이 떠오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 경우가 많이 다르다. 파리에서는 고작 3박 4일을 머물렀기에 충분히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유럽에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30박 31일을 머물더라도 새로운 발견이 끊임없이 이어질 '파리'에서의 3박 4일은 '수박의 겉핥기'보다도 못 한, 깊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여행이었다.

 

 헌데 이스탄불에서는 도무지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합당한 이유가 아닌 그럴싸한 핑계라면! 핑계란 찾기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듯이 '뭘 했는가?'에 대한 핑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부터 오른쪽 무릎이 아파왔다. 오른쪽 무릎은 원래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니어서 때때로 아프다 안 아프다를 반복해왔다. 헌데 이번 통증은 뭔가 그 성질이 달랐다. 통증의 느낌이 다르고 또한 미약한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또 사라진다는 느낌도 없이 계속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원래는 하루 종일 먹이를 찾아 또는 텃세를 부리는 성질 더러운 다른 들개들로부터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터키의 들개처럼 도시의 구석구석을 하염없이 돌아다녔을 나는 오랜 시간을 무릎의 회복을 위해 숙소에만 처박혀 있어야 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콕콕 쑤시는 무릎을 애써 외면하며 언제 다시 돌아올 지 모르는 이 기회를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도 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정보를 보고 그랜드 바자르, 톱카프 궁전, 갈라타 타워 등 역사/문화적인 장소를 방문하기도 하고 탁심 광장과 니샨타쉬를 포함해 도심의 구석구석을 탐방하기도 했다.

 

 헌데 이스탄불은 타 도시들과는 뭔가가 달랐다.

 

 나는 여타 다른 여행객들이 그렇듯 어떤 도시나 관광지를 방문할 때마다 'oo에서 꼭 방문해야 장소 목록'을 작성했고 내게 있어 하나씩 그 목록을 지워가는 뿌듯함과 보람이 매우 쏠쏠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스탄불에서는 그런 뿌듯함과 보람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이 도시를 알아갈수록 무언가가 빠져도 제대로 빠진 듯한 공허함과 진한 여운이 더해갈 뿐이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무릎의 통증도 내게 있어 큰 염려였지만 몸과 마음이 전반적으로 여행의 여독으로 침울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여행의 권태를 느끼기 시작한 걸까?

 

 이스탄불에 오기 전 나는 한 달 정도 알바니아 '슈코더르'에 위치한, 가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키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며 한겨울을 보냈다. 게스트하우스의 아담한 공용공간(거실)에는 따뜻한 주물벽난로와 안락의자가 있었고 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미드나 유튜브를 보면서 한가롭고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이런 신선놀음 같은 평화로운 생활 후, 고작 한 달 정도 알바니아에서 이스탄불까지 1,000km 남짓 자전거를 탔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여독을 느끼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겨울의 추위와 허기, 그리고 이스탄불의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여독과 뒤섞여 이스탄불에서 지내는 동안 내 심신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이런 복잡하고 축 처진 감정이 무릎의 회복을 늦추고 내 마음에 잔잔하지만 끊임없는 파동을 일으킨 거 같다. 오르한 파묵이 언급한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분위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 '비애'가 면역력이 약해진 아이를 덮친 독감처럼 나를 덮친 것이다.

 

 이스탄불에는 유난히 아이들이 많았다. 공원마다 골목마다 아이들이 넘쳐 흘렀고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뛰어다니거나 어떤 놀이를 하거나 소리를 치는 둥 거리 전체에 더 큰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었다.

 

 파란 하늘 아래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 어린시절이 떠오른 건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걱정 없이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될 때까지 웃고 떠들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억울하거나 분한 마음을 품으며 보냈던 사사로울 것 없는 어린 시절의 하루하루. 아이들 앞에서 그 시절의 내가 너무 그리워져서 얼굴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심장은 울고 있었다.

 

 인생의 어느 시점을 돌이켜보며, 특히 어린시절을 돌이켜보며 '그때가 좋았지'라는 그립고 정겨우며 애타는 감정을 품지 않아 본 사람이 과연 세상에 존재할까?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도 '제인에어'의 '제인 에어'도 어린 시절이 무척 궁핍하고 가혹했을지언정 그 속에서 만난 진정한 친구와 따뜻한 호의, 굶주림을 달래주던 빵과 치즈 한 조각 등은 분명 그들에게도 행복하고 그리운 어린 시절을 연상시킬 것이다. 하물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이미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해봤자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며칠 전 본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작년의 한국의 출산율을 보여주는 기사였다.

 

 2019년 한국의 출산율은 0.92명으로 세계 꼴찌와 더불어 세계 최초 0명대 출산율이라는 크나큰 명예(?)를 얻었다. 객관적인 수치를 너무나도 잘 대변하듯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더 이상 놀이터나 공원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일이 쉽지 않아 졌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이 사라진 거리는 한겨울 새벽녘, 싸늘한 바람만이 휑히 부는 설국(雪國)처럼 적막과 고요, 황량함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놀이터가 텅 빈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 저출산 시대를 맞아서 전체적인 파이값도 줄었겠지만 다른 요인들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과연 조기교육의 열풍에 휩쓸려 이른 나이에 학원에 가야 하는 의무가 없는 아이가 얼마나 있을까? 봇물 터진 듯 쏟아지는 핸드폰/컴퓨터 게임에 빠지지 않은 아이가 얼마나 될까? 또한 아이를 혼자 밖에 내보는 걸 편집증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우리나라의 출산율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해 보고 싶다. 사실 출산율 따위는 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어차피 정부나 언론, 경제학자 등이 출산율을 신경 쓰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이다. 출산율의 저하가 곧 인구의 감소 그리고 한국 경제의 발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출산장려정책과 아이를 키우기 위한 적절한 인프라 확보, 출산 후 여성의 취업시장 재진입을 용이하게 만들고 또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사회 내에서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바람직한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 등. 분명히 바람직한 방향이고 좋은 얘기지만 개인주의가 더욱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어쩌면 이런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단란한 가정을 갖는 것보다는 직장에서 더 성공하고 싶은 여성. 자식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가꾸며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즐기며 살고 싶은 여성. 결혼의 존재 의미를 더 이상 느끼지 못 하는 여성 등. (이 모든 건 좀 다른 형태로 남성들에게도 적용될 테다.)  

 

 예컨대 직장에서 더 성공하고 싶은 여성을 논할 때, 아이 둘이 있는 엄마와 독신 여성 중 누가 본인의 경력을 위해 더욱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겠는가? 답은 불보듯 뻔한 것이고 기회비용이라는 경제용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의 욕구가 점점 더 다변화되는 추세를 맞아 앞으로도 더욱 더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게 아닌, 독신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삶에 더 만족하고 행복해하며 살아갈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독신 또는 독신을 천명한 남성도 늘어나는 추세지만 독신 남성의 경우, 본인의 선택인지 아니면 포기인지 알 수가 없다.) 

 

 고로 우리나라도 더 이상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연상시키는 폐쇄적인 이민정책을 내려놓고 더욱더 다문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건 어떨까?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 그리고 20세기 말의 미국 등 역사상의 모든 영광스러운 제국이 그랬듯, 소위 정말로 경제뿐만이 아니라 역사/문화적으로도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다문화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다문화 국가를 이룩함으로써 인구 감소를 해결하고 더불어 한국인이(이 경우는 인종과 언어 상관없이 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시민)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여 적합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코스모폴리탄'으로써 자국의 발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발전과 번영,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더 넓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 수 천 년동안 한반도에는 오직 단일 민족으로 거주했다는 역사적 사실 등으로 인해 이게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기가 수천 번의 실패 끝에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고 곧 걷기 시작하듯 시작은 힘들지라도 나는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다'고 믿는다.

 

 각설하고 다시 이스탄불의 아이들 얘기로 돌아오자.

 

 나는 아이들을 정말로 좋아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작은 희망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에서는 과거 대제국으로서의 영광과 몰락 그리고 현대의 '메트로폴리탄'으로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발전된 모습과 그 이면에 감춰진 노후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니샨타쉬나 탁심 광장 또는 아야 소피아와 톱카프 궁전이 있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과 그랜드 바자르 등에서는 깨끗하고 활력이 넘치는 거리와 장구하고 화려한 역사문화적인 유적을 배경으로 경쾌하게 활보하는 현지인과 관광객을 목격한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교차하는 다양한 피부색과 언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꼭 마치 그 옛날 튀르크족 이외에도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럽인, 흑인 등이 조화롭게 살아가던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곳들에서 한 블록 두 블록 정도만 벗어나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노후화된 건물이나 쓰레기와 찌린내로 진동하는 골목 또한 쉽게 발견한다.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런 풍경의 극적인 변화는 의외로 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기는커녕 니샨타쉬의 화려함이나 탁심 광장의 활력보다 더 인상 깊게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이유의 중심에는 바로 여전히 남아 있는 이스탄불 특유의 '멜랑콜리'한 느낌과 더불어 골목 구석구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이들이 가져다주는 생명력과 희망이 있었다.

 

 마치 중학교 체육시간에 반 전체가 운동장에 나와 팀을 갈라 피구를 하듯 공원에 놀러나온 모든 아이들이 팀을 나눠 공 던지기 놀이(분명 피구일 테다.)를 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보기 좋았다. 덩치나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이 참여한 이 게임에서 너도 나도 모두가 무척이나 즐거워 보인다. 나도 체면 따위는 잊어버린 채 슬쩍 저 속에 껴서 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를 정도였다.

 

 이스탄불의 아이들은(대부분 남자 아이들의 경우)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형이나 어른들과도 곧잘 어울려 지내는 거 같았다. 그들은 큰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때로는 친한 친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나 영세 사업장에서 배달이라든가 간단한 일 등을 도와주는 광경을 쉽게 목격했는데 그 아이들이라고 하면 이제 갓 중학생이 되었거나 아니면 그보다도 어린, 정말로 어린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도무지 그들의 아버지로는 보이지 않는(또한 친형도 아닌) 사람이 일하고 있는 가게에서 일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는데 이건 대체 어찌 된 사연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변한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아이들이 넘쳐나는 터키에도(엄밀히 말하면 튀르크인들에게)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듯이 여성의 고학력이 점점 보편화됨에 따라 남녀 모두 결혼 평균 연령은 높아지고 그와 반비례해 출산율은 낮아지고 있다.

 

 한편 이스탄불의 정반대, 터키의 동부 지역과 아나톨리아 반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전혀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쿠르드족과 그 외 터키 내 소수민족인 시리아인, 아랍인들은 여전히 평균 3명 이상의 아이들을 낳고 있는 것. 이로 인해 몇십 년 후면 터키 땅에서 아직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전통의 튀르크족이 소수민족이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 섞인 말도 나온다. 

 

 학창 시절 국사보다는 세계사를 더 좋아했다. 대게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그렸던 간에 조그만 액자에 담긴 그림보다는 천장 가득, 벽 가득 그려진, 위엄이 느껴지는 거대한 그림이 더 흥미롭고 멋있게 보이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내게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아기자기한(?) 사건들보다는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더욱 흥미로웠다.

 

 헌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때 배운 세계사에서 '이슬람의 발원'이나 '4대 칼리프 시대', '셀추크 시대'는커녕 '오스만 제국'이나 '이슬람교'를 다룬 내용을(한 번이라도 언급을 했는지조차 의문이다.) 그 어디서도 보지 못 했던 거 같다. 세계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역사인데도 마치 누군가가 마법이라도 부린 듯 감쪽같이 우리나라의 세계사 교육 과정에서 생략되었다.

 

 오랫동안 그 맹위를 떨치고 있는 서양 문화의 중심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특성이 역사 교육의 이런 편협된 방향을 의도적으로 조장했고, 그 결과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이슬람에 대해서, 무슬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나라고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이슬람'을 처음 접한 건 이번 여행을 통해서였으니까. 운 좋게 여행의 기회를 갖지 못 했다면 나도 평범한 한국 사람처럼 이슬람에 대해서 막연한 생각과 편견을 가진 채 살아갔을 게 분명하다.

 

 인터넷 뉴스의 댓글란을 보면 타문화와 종교, 인종,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곧 알 수 있다. 

 

 국제 뉴스와 관련해서 그 뉴스가 무슨 내용이던간에 한국 사람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세 가지 키워드가 있는 거 같다. 그 세 가지 키워드란 1.일본 2.중국 3.이슬람.

 

 일본은 모두가 알다시피 일제강점기 때의 그 처절하고 부끄러운 기억과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뻔뻔한 태도,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본 AV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인식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 같다.

 

 중국은 현재는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한국의 외교노선(한국은 미국의 외교정책에 있어서 5개의 눈이라 불리는, 미국의 최우방국인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다음으로 중요한 동맹국이다. 중국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년 한미 연합훈련을 실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과 더불어 불과 이십 년 전만 해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던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인한 부 그리고 그것을 고깝게 여기는 한국인의 태도, 중국의 경제규모에 결코 부합하지 않는 몰상식한 행태 등이 복합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 같다.

 

 일본이나 중국은 우리나라 역사 교육 과정에서 꽤나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하고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이웃나라이기에 그 소식을 주기적으로 듣는다. 그 결과, 역사나 타문화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일지라도 중국과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의 의견을 나름 객관적인 정보에 근거해 피력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수준을 갖추고 있다. (이런 지식이 대부분 부정적인 방향으로 쏠려있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반면,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그야말로 무지와 무관심, 서양 미디어의 잘못된 관점에서 오는 오해로 인한 것이다. 아직도 '이슬람=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ISIS는 이미 거의 진압된 상태이고 탈레반이나 '오사마 빈라덴'으로 잘 알려진 알카에다가 그나마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가느다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단체들은 '극 이슬람주의'라는 노선을 천명한 그야말로 테러조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극'이란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린 상태로 끓는 물과도 같은 것이기에 이러한 단체나 그에 소속된 사람들을(강제나 속임수가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채 참가한 사람들)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나온 파이의 어머니는 파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세상은 가르쳐 줄 순 있지만, 여기 있는 건(가슴을 가리키며) 못 가르쳐 줘. 반면, 종교는 내 가슴과 영혼을 가르쳐주지."

 

 터키는 공식적인 이슬람 국가이다. 국민의 90% 이상이 무슬림이다. 스스로 '무슬림'이라 자칭만 하고 이슬람의 5계율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세속적인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터키 사람들에게는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 특유의 따뜻하고 호의적인 태도가 느껴지는 거 같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자리 잡은 지 이미 천 년을 훌쩍 넘은 '이슬람교'의 보이지 않는 종교적인 관대함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과 영혼에 깊숙이 자리매김을 했다고 여겨도 큰 무리가 없지 않을까? (물론 예부터 실크로드에 가장 중요한 통로로서 대(大) 상인이나 외부인들을 환대하는 문화가 있었지만 종교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로 난 이 자리를 빌어 혹시나 이 글을 꼼꼼하게 살펴볼 사람들이나 그게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를 위해 '이슬람'의 가장 기본적인 5계율과 또 이슬람을 상징하는 '히잡'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그 정통적인 의미에 준거하여 말해보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모스크)에 입구에 나란히 세워져 있던 안내판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 많은 관광객과 방문객들 중 아무도 주의 깊은 시선을 주지 않던 이 안내판이 내게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블루모스크' 자체보다 더 흥미로웠다.

 

 

이슬람 5계율

 

1. SHAHADAH (Declaration of Faith) : 신은 오직 '알라' 뿐이다.

2. SALAAH (Five Compulsory Daily Prayers) : 신성한 장소인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 기도하기

3. ZAKAAT (Almsgiving) : 매년 자신의 부의 2.5%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부하기

4. SAWN (Fasting During the Month of Ramadhaan) : 일 년에 한 달, 라마단 기간에 금식하기

5. HAJJ (Pilgrimage to the Holy Sites in Makkah) : 평생에 한 번은 신성한 장소 '메카' 방문    

 

 

히잡에 관하여

 

- 히잡은 세간에 논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논쟁은 히잡을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히잡은 보통 여성이 자신의 신체 부위(특히 머리)를 가리는 시각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그 안에는 더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히잡의 단어적 의미는 '가리고 은폐하다' 라는 뜻으로 그 행위의 수단은 옷이 될 수도 말이 될 수도 행동이 될 수도 있다. 고로 히잡은 단순히 옷으로 신체부위를 가리는 걸 넘어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도덕적 행위, 태도, 생각, 양심, 의도 등을 '신중하고 조심히 행하라'라는 더 넓은 뜻으로 확대된다. 

 

 여성은 히잡을 착용함으로써(옷에 대한 의미로) 더 큰 자유를 느낄 수 있고 남성들의 불건전한 의도와 시선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다. 또한 외모나 유행 따위의 겉모습보다는 자신의 내면의 아름다움, 예컨대 올바른 지성과 도덕, 성향 등을 더 가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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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 be continued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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