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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안탈리아~콘냐) - 휴양 도시 안탈리아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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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 횡단 자전거 여행

- 터키(안탈리아 ~ 콘냐)

휴양 도시 안탈리아 그리고 아나톨리아 반도.

[2020. 3. 22. ~ 3.28.]

 

*관광객이 하나도 없는, 터키의 최대 휴양지 안탈리아

*모닥불 피우기

*아나톨리아 고원의 대도시, 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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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이 하나도 없는, 터키의 최대 휴양지 안탈리아.

 

[If you feel tired, stop and do something else and then keep going. So, don’t think of it as a hundred kilometers. Think of it as chunks, five chunks of 20km.]

 

[힘들면 잠시 쉬면서 다른 걸 한 다음에 다시 길을 나서는 거야. 너무 먼 앞을 생각하지 마. 100km를 간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20km씩 다섯 번을 간다고 생각해.]

 

 여성으로서 가장 어린 나이에(20) 자전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돈 기록을 세운 ‘Vedangi Kulkari’라는 인도 여성이 한 말이다.

 

 오로지 내 두발만을 의존해서 달려야 하는 길고 긴 여정 속에서 나를 심신 양면으로 지탱해 준 것 중 하나는 바로 목적지라는 목표였다. 최종 목적지는 물론 그리운 내 고향이지만 그 여정 속에서 나는 수많은 기착(寄着) 목적지를 가지고 있었다.

 

 기착 목적지는 내게 있어 그녀가 말한 20km 지점과 상통했다. ,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그늘에 앉아서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며 잠시 쉬어가는 곳.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곳.

 

 기착 목적지에 당도할 때면 나는 맛있는 걸 사먹거나 그날은 자전거를 타지 않고 여유롭게 보내는 둥 스스로에게 그동안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보상을 선물했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다시 수백 킬로를 달릴 수 있는 힘이 자라나곤 했다.

 

 뭐 기착 목적지라는 거창한 말을 쓰지 않더라도 대충 유명한 관광지나 대도시, 자연 경관이 화려한 곳 등이 내 머릿속 미터기를 다시 영으로 돌리는 장소가 되었다.

 

 안탈리아가 걔 중 하나였다. 터키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계속 확산됨에 따라 사람들의 인심이 점점 흉흉해지는 와중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휴식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힘겹게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안탈리아로 직결되는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내 마음은 새처럼 날아갈 거 같았다. 안탈리아가,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지중해의 천국 도시가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안탈리아에 도착하기 전 이러한 기착 목적지 중에 파묵칼레라는 곳이 있었다.

 

 파묵칼레는 터키를 방문한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꼭 들르는 곳 중 하나이다. 파묵칼레는 터키의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써 석회 성분이 들어있는 온천수와 그 특이하고도 빼어난 경관이 방문하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는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 천연 온천, 아름다운 자연 경관까지 파묵칼레는 나를 미치게 만드는 삼박자를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부터 천연 온천에 푹 빠져 있던 내게 천연 온천이라는 수식어가 갖는 매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허나 불행히도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파묵칼레도 그 주변도 마치 폐허가 되어 버린, 버려진 광산처럼 모든 게 차갑고 을씨년스러웠으며 꺼림칙할 정도로 너무나 조용했다.

 

 관광객의 그림자는커녕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도 없었고 주변의 기념품 가게나 음식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공원 맞은편에 있던 상당히 큰 규모의 중국 레스토랑에서 느껴지는 싸늘함이 이곳의 절망적인 상황을 대변하는 거 같았다. 이곳이 관광지라는 걸 알려 주는 유일한 흔적이라고는 파묵칼레 공원 호수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오리배 뿐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온천욕은 불가능할 지라도 사진에서 보았던, 계단신 논처럼 생긴 파묵칼레 온천의 진풍경만큼은 꼭 보고 싶었다. 고작 파묵칼레 호수 위를 둥둥 떠다니는 오리배와 오리를 보자고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게 아니었다.

 

 공원의 가장자리에는 빙하처럼 생긴 새하얀 석회암층이 있었다. 그 석회암층 위로 파묵칼레로 입장하는 입구가 있었다. 입구에는 기계식 개찰구와 작은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부스 안에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실치 않다. 하지만 빨간색 진입 차단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고 ‘Close’라는 영어 글씨가 꽤 멀리서도 볼 수 있게끔 크게 써져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임시 휴업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찾아온 내가 바보였지만 인터넷 없이 여행을 하고 있는 내게는 이런 정보를 미리 알 도리가 없었다.

 

 터키 여행에 상당한 내공이 쌓인 지금이라면 (약간의 부정을 저지르더라도) 들어갈 수 있는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아직 터키 현지 사정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을 뿐더러 철저한 준법주의자였다. 그런 내가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서는 일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코로나 바이러스!!’

 

 이렇게 범인(凡人)들이 뽑는 터키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파묵칼레라는 관광지를 날려(?) 버린 후,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 한 채 오직 안탈리아를 향해서 달려온 나였다.

 

 파묵칼레를 지나 데니즐리(Denizli) 이후로 시작된 높은 산맥을 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지가 높아짐에 따라서 날씨도 점점 추워졌고 동시에 주변 환경 또한 더 척박해졌다. 도로변에는 어쩌다가 한 번씩 간이 휴게소가 있을 뿐 마을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식당이라든가 슈퍼마켓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중해의 온화한 날씨와 에메랄드빛 맑은 해변이 그리워졌다. (돈만 있다면) 뭐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문명이 가져다주는 편리한 혜택 또한 그리웠다. 나는 어서 빨리 안탈리아에 도달하고 싶었다.

 

 잠시 안탈리아에 대해서 알아보자.

 

 안탈리아는 터키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자 대표적인 휴양 도시이다. 터키를 방문하는 한국인 여행객 중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스탄불, 파묵칼레, 카파도키아와 더불어 꼭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안탈리아는 특히 러시아인과 독일인이 많이 찾는 관광지이다. 2019년 통계에 의하면 한 해 동안 러시아에서 약 550만 명이 그리고 독일에서는 약 250만 명의 관광객이 안탈리아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우크라이나(80)와 영국(68), 폴란드(53), 네덜란드(42) 등 안탈리아는 유럽인들의 주요 관광지로 각광 받고 있다.

 

 비단 안탈리아 시(市)뿐만 아니라 안탈리아 주의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해안 도시들은 대부분 휴양 도시로서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알라니아(Alanya)에서 안탈리아까지 이어지는 메인 도로에는 디즈니의 궁전이나 라스베가스의 호텔/카지노를 연상케 하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하는) 호텔들이 즐비 한다. 한편 FenikeKas 같은 곳은 숨겨진 진주마냥 소박하지만 정겨운 분위기의 휴양지이다.

 

 안탈리아의 구시가지 칼레이치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활기가 넘쳐야 하는 구시가지에는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터키에서 가장 뜨거운 관광지라는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외국인 관광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그나마 지역 주민들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리를 양쪽으로 가득 메운 상점들은 반은 닫혀 있었고 나머지 반만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장사를 하는 건 옷가게라든가 기념품 가게 등 물건을 파는 가게뿐이었다. 대부분의 카페와 식당들은 문을 닫았다. 야외석의 의자들은 꼭 '한동안은 장사 안 합니다'라는 걸 말하듯이 모두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상점들의 주인들은 나를 발견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은 마치 내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터키에서 관광지로 가장 뜨거운 장소 중 하나인 안탈리아에서, 그것도 가장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구시가지의 상인들이 일개 관광객에 불과한 나를 보고 놀라는 이 상황이란.’

 

 그렇다. 터키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점점 확산되는 와중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부의 여러 가지 규제는 일시적이나마 관광객의 씨를 말려버린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짜잔하고 나타난 아시아인. 현지 상인들에게 내 존재가 꽤나 신기했던 게 분명하다.

 

 혹자는 복잡한 것보다는 조용한 게 낫지.’라며 이 상황을 반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탈리아는 많은 지중해 주변의 도시들이 그렇듯 축제와 휴양의 도시였다. 관광객이 사라진 도시는 마치 긴 동면에라도 빠진 듯 조용했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고요함과 정적은 결코 이 도시가 가지는 매력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렇다고 해서 도시가 그 본연의 모습조차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안탈리아의 고양이도 이스탄불의 그것처럼 친절한 사람들에 의해 잘 보호를 받는지 여기저기 고양이가 우글거렸다. 구시가지의 좁은 이차선 도로의 중앙선에는 족히 10m가 넘어 보이는 야자나무들이 빼곡히 심어 있어서 휴양 도시로서의 정취를 더했다. 길거리는 터키에서 보아왔던 그 어떤 곳보다 말끔하고 깨끗했다. 간간이 눈에 띄는, 로마 시대 사람들을 표현한 초록색 조각들의 그 생뚱맞은 표정과 상황 연출은 웃음을 자아냈다.

 

 구시가지 골목에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세련되고 정갈한 건물들이 주변 환경에 맞추어 질서 있고 조화롭게 세워져 있었다. 터키의 전통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는 퇴창들이 안 그래도 좁은 골목을 시각적으로 더 압축시켜 놓았다. 나는 서로 마주본 퇴창들의 창문이 열리고 히잡을 쓴 여인네 둘이 나타나 허공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화하는 소소한 풍경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마당이 있는 집에는 여러 가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마당이 없는 집은 인도(人道)의 가장자리에 화분을 마련하고 거기에 다양한 수목들을 심어 놓았다. 이렇게 수목을 사랑하는 주민들의 관심 덕분에 마을 전체가 참 색감이 알록달록하고 유난히 평화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구시가지 내에 조성된 공원은 마치 숲 전체를 통째로 옮겨 놓은 것처럼 수풀로 우거져 있었다. 인공적이지만 아름다운 그 모습은 내게 어렸을 적 딱 한 번 방문했던 거제시의 외도를 연상시켰다.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깎아서 만든 멋진 사슴 조각상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쪽에는 노란색 튤립이 그 부드럽고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내가 식물에 대해 일자무식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길을 지나가며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를 보아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가려낼 수 없었다.

  

 물론 장미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향기롭다.’라는 명언처럼 이름을 아는 것보다 그 실체를 온몸으로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 이름과 특성까지 알면 더 흥미롭지 않겠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감히 한 마디 더 추가하자면 아는 만큼 즐겁고 재밌는 법이다. 식물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이 아름다운 공원이 그냥 한 번 지나치고 마는 평화로운 장소를 넘어, 교육의 장소로 또는 영감의 장소가 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일상의 소소하고 작은 것에서도 영감과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이 보고 느끼며 무엇보다도 스스로 알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안탈리아에서 대략 세 시간 정도를 보내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자전거 길은 그야말로 환상의 자전거 길이었다. (비록 그 길이는 짧았지만) 아직 3월 말이라서 그런지 자전거 길 오른쪽으로 펼쳐져 있던 공원에는 아직 다 녹지 않은 겨울의 차가움과 쓸쓸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완전한 봄이 찾아오면 이곳은 그야말로 지역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휴식처가 되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고 푸른 공원이었다.

 

 안탈리아의 도심지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모래 바닥에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나있는 해안가 근처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저녁으로 파스타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여장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키가 굉장히 컸으며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가발인지 아니면 실제 머리인지 모를 장발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제법 진하게 화장을 하고 몸에 착 달라붙은 짧은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그야말로 혐오 그 자체였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정체 모를 징그러운 생물체에게 느낄 법한 지독한 혐오감!

 

 이 괴수는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혹시 너 할래?”
“(하다니? ? 설마?) 아니. 나는 괜찮아.”
?”
“(왜라니 이 미친 놈아!) 나는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

 

 음... 나는 성소수자를 비교적 열린 마음으로 관대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아무리 성욕에 찌든 게이라 할지라도 이런 괴수 같은 남자와 과연 하고 싶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호주에 있을 때 많은 레즈비언 커플을 만났다. 대부분은 대만에서 온 커플이었다. 과연 아시아에서 최초로 동성 관계를 합법화 한 나라!

 

 결례를 범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걱정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궁금한 나머지 그들 중 한 커플에게 어쩌다가 레즈비언이 되었냐고 건방진(?)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 한 것이었다.

 

 “나는 레즈비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현재 내 파트너를 좋아하는 거거든.”

 

 그녀의 대답은 내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다른 여성이 아니라 그녀의 파트너라는 사실. 그렇다는 건 그녀의 파트너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고 해도 좋아했을 거라는 뜻이었다.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성소수자들 중에는 상대방이 동성이라서 끌리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성이고 동성이고를 떠나서 그 사람,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인 그 사람이기에 끌릴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문득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가 떠올랐다. ‘인우는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태희의 분신과도 같은 현빈과 사랑에 빠진다. 태희는 여자이고 현빈은 남자인 걸 생각하면 인우는 성별에 상관없이 특정 사람에게 숙명적으로 끌린 것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맥락으로 밟아 죽여도 시원찮을, 이 괴수 같이 생긴 남자에게 과연 그 누가 호감을 느낄까 의문이었다.

 

 그가 사라진 후 나는 절대로 바라지 않은 일에 내 아까운 뉴런세포를 낭비하고 있었다. 그 괴수 놈이 저 수풀 너머로 그 짓거리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 것이다.

 

 혹시라도 근처에서 이루어졌을지 모르는 괴수끼리의 끔찍한(?) 정사를 생각하니 밥맛이 뚝 떨어졌다. 도무지 파스타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파스타의 흐물흐물한 감촉이 역겹게 느껴졌다. 음식을 낭비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나지만 어쩔 수 없이 남은 파스타를 버리고 자리를 떠났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캠핑하기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완벽한 은폐물이 되어 주었고 그 주변의 땅은 대체로 평평해서 텐트를 피기에 적합했다.

 

 한 60m 정도 떨어진 메인 도로에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 외에는 주변의 아무런 인기척 없이 매우 평화롭고 고요했다. 가끔씩 근처에 위치한 안탈리아 공항을 향하는 비행기가 지나가며 굉음을 내었지만 그것도 해가 저물자 그 빈도가 눈에 띄게 뜸해졌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지만 기온은 여전히 온화했으면 하늘은 청명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텐트에서 침낭 안에 몸을 파묻고 곤히 잠들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오늘 하루는 편안하게 꿀잠을 잘 수 있겠다.’

 

 이렇게 행복감에 젖어 잠이 들었는데... 꿀잠은 개뿔...

 

 밤이 깊어가자 어디선가 동물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개였다.

 

 이따금씩 들려오던 들개의 짖는 소리가 점점 더 빈도수가 잦아지고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댐이라도 부서진 듯 짖는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폭발적으로 들려왔다. 소리와 주변의 기척으로 짐작하건대 마치 수십 마리의 들개들이 패싸움이라도 벌이는 거 같았다. 짖는 소리뿐만 아니라 달리는 소리, 깨갱거리는 소리, 으르렁거리는 소리 등 들려오는 소리도 다양해졌다.

 

 들개 몇 마리가 내 텐트로 접근해왔다. 그들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으르렁대며 텐트를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나는 텐트 안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숨을 죽인 채 아무 일 없이 그들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무서웠다. ‘저 망할 들개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내 텐트를 향해 돌진하고 물어뜯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들었다. 한낮 같으면 당장 텐트를 박차고 나가서 들개들 몇 마리쯤은 맨손으로도 처치(?)할 테지만 밤에는 그럴 수 없었다. 밤의 어둠은 모든 걸 한층 더 무섭게 만든다. 밤의 들개 떼는 늑대 떼만큼이나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당연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들개들이 제발 멀리 가주기를 바라며 또한 이 패싸움을 누가 이기든 간에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하룻밤 내내 잠을 설쳐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을 품고 텐트를 박차 나왔다. 상황 역전! 환한 낮에는 들개 따위 비둘기만큼도 무섭지 않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터키의 들개에 한하는 얘기다.) 내 꿀잠을 망친 그네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마침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들개 세 마리가 다리를 포개고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나는 어제 저녁의 치욕을 갚아줄 생각으로 아아악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향해 그야말로 미친 들개처럼 달려갔다. 그들은 깜짝 놀라서 혼비백산을 하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도망을 쳤다. 나는 여전히 분이 안 풀려서 계속 소리를 지르며 잠시 그들을 쫒아 모래 위를 쏜살같이 달렸다.

 

 꼬리를 말고 헐레벌떡 도망치는 들개가 불쌍해 보였던 걸까? 갑자기 생뚱맞게 들개들에 대한 애정이 자라났다.

 

 나는 원래 개에 환장하는 인간이다. 개들의 앙증맞고 귀여운 외모는 마치 떡볶이나 곱창처럼 일단 내 시야에 들어오면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뽀뽀해주고 싶고 깨물어 주고 싶고 심지어는 먹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착한 사람인 척 교태를 부리며 그들을 불러 보았다. 당연히 그 어떤 개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서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미친 사람이 분명해. 엄마가 미친 사람에게 물리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다고 했어. 절대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겠다.’라며 핀잔을 줄 뿐이었다.

 

 “야 임마! 해치치 않을 테니까 잠깐만 이리로 와봐. 잠깐만. 쭈쭈쭈쭈

 

 나는 한동안 모래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늘이 두 쪽이 난다고 해도 결코 오지 않을 개들을 하염없이 불러보았다.

 

 *모닥불 피우기

 

- 터키 서남부에 자리 잡은 타우루스 산맥은 지중해와 아나톨리아 고원을 양분한다. 안탈리아로 넘어 오기 위해 북에서 남으로 타우루스 산맥을 넘었다면 이제는 중부의 대도시 콘냐(Konya)로 가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타우루스 산맥을 다시 넘어야 했다.

 

 SerikManavgat을 지나 Kizilot에서 방향을 왼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D400 도로를 타고 달리면서 왼편으로 보이던, 산봉우리에 하얗게 눈이 쌓인 거대한 산맥들이 이제 내 정면을 가로막았다.

 

 자전거로 지나가는 최고 해발은 1,825m로 이화령(548m)의 세 배 이상 되는 높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1,825m라는 해발 자체도 상당하지만 해수면으로부터, 즉 해발 0m부터 1,825m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가야 한다는 게 압박이었다. 그 말인즉슨 경사가 상당하는 것!

 

 자전거 여행은 나 자신과의 싸움, 날씨와의 싸움 등 여러 가지 싸움을 동반하지만 산을 오를 때는 결국 중력과의 싸움이다. 내 자신의 체중을 포함해서 40kg이 넘어가는 자전거와 짐들의 무게를 오로지 스스로의 힘만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높은 산의 경사는 이 모든 일을 두 배 세 배 더 힘들게 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자전거로 산을 오르는 게 굉장히 터프하고 힘든 일인 것처럼 서술해 놓았지만 사실 실상은 전혀 달랐다.

 

 중력이라는 놈의 기본값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내게는 시간이라는 아군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힘들면 자전거에서 내려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자전거를 밀고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 새 정상에 도착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특히 26살 때 일본 자전거 여행을 할 때는 죽기 살기로 페달을 꾸역꾸역 밟아서 오르막길을 올랐다. 힘들어서 자주 멈추기는 할지언정 자전거에서 내려서 밀고 가는 일은 없었다. 그때는 자전거를 밀고 간다는 거 자체가 내 꽃다운 젊음을 기만하는, 뭔가 치욕적인 일로 느껴졌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었고 무릎이나 허리 등의 연골도 예전처럼 튼튼하지 않았다.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재미를 깨닫기도 했다. (무게가 있기에 자전거를 밀고 가는 것도 꽤나 힘든 일이긴 하다.) 무엇보다도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천천히라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만 하면 언젠가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삶의 통찰을 얻었다.

 

 그렇게 때로는 자전거에 올라타 시속 7km로 페달을 밟아 나아가고 때로는 자전거에서 내려 시속 4km로 자전거를 밀다 보니 어느새 800m 고지에 다다랐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으므로 오늘은 이 근처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이차선 메인 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적당한 캠핑 장소를 찾았다. 한쪽에 돌들이 둥글게 깔려 있었다. 누군가가 모닥불을 핀 흔적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지난 8월에 한국을 떠나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행 기간의 태반을 텐트를 치고 야생 캠핑을 했다. 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모닥불을 피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유럽의 몇몇 국가에서는 야생 캠핑이 불법이라서 워낙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캠핑을 했던 게 그 이유라면 이유였다. 또한 딱히 모닥불을 피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고 무엇보다 경험이 없었기에 어떻게 피우는 지 그 방법을 알지 못 했다. 무슨 일이든 경험과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는 간단한 일도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는 법이다.

 

 이 기회에 모닥불을 피어 보기로 결심했다. 마침 날씨도 조금씩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적어도 내 시야가 닿는 곳에는 나무와 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불을 지핌으로써 내 위치가 발각될 염려도 적었다.

 

 인터넷으로 모닥불을 지피는 방법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다.

 

 우선 불쏘시개라는 게 필요했다. 불쏘시개는 불을 피울 적에 불이 쉽게 옮겨 붙도록 먼저 태우는 물건을 뜻한다. 검불이나 마른 잔가지, 솔방울, 관솔, 종이 등이 좋은 불쏘시개이다. 풀무 같은 게 있으면 불을 일으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없다면 입으로 바람을 불어도 괜찮다. (단, 재가 입에 들어가는 걸 조심하자!)

 

 불을 붙이는게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일단 불만 제대로 붙으면 80%는 끝났다고 보면 된다.

 

 나에게는 취사할 때 쓰는 고형연료가 있었으므로 그걸 잔가지에 뿌리는 걸로 이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어려운 작업을 쉽게 해낼 수 있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 이 불을 만들기 위해 원시인처럼 나무를 열심히 비볐던 일을 생각하면 라이터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현대의 기술은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다.

 

 확 타오르는 불에 마른 나뭇가지 몇 개를 넣어주자 불은 따닥따닥 소리를 내가며 더 강한 기세로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타들어가는 모닥불 앞에 나는 마치 남몰래 불장난을 하는 어린이마냥 가슴이 두근거렸다. 삽시간에 불이 번져서 산 전체를 새까맣게 태워버리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모닥불도 나도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앉아서 아무 생각 없이 주변을 환희 밝히는 홍염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었다.

 

 보통 저녁을 먹을 때는 따분함을 달래려고 음악을 듣는다. 허나 오늘은 음악이 따로 필요 없었다. 타오르는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모닥불이 내 친구마냥 옆에서 나를 지켜 주었고 또한 따뜻한 온기를 전해 주었다.

 

*아나톨리아 고원의 대도시, 콘냐.

 

- 터키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타우루스 산맥을 지나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넘어왔다. (다른 하나는 폰투스 산맥) 아나톨리아 고원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그 어떤 곳과도 달라도 많이 달랐다.

 

 아나톨리아 고원에 위치한 터키 중부의 대도시 콘냐로 진입하는 내리막길에서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눈앞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해발 1,000m 라는 걸 고려하면 더욱 믿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동서(東西) 방향 그 어디로도 대지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지평선만이 저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며 내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었다. 북쪽 방향 저 멀리로 커다란 산맥이 흐릿하게 보여서 이곳이 높은 고지대라는 걸 새삼 되새겨 주었다.

 

 잠시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아나톨리아는 오늘날 터키 영토에 해당하는 반도를 말한다. 이 거대하고 비옥한 땅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으로 인해 예부터 이 땅에는 크고 작은 많은 문명이 스쳐 지나갔다. 세계사를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문명이라 할 수 있는 아시리아, 히타이트, 로마, 비잔티움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이 이 땅을 토대로 번성하고 멸망했다.

 

 터키는 자국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만으로 8천 만이 넘는 전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세계의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이런 풍부한 생산물의 대부분은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의 비옥하고 넓은 땅에서 비롯된다.

 

 약 7천 년 전 4대 문명이 탄생한 이후 인류 역사에 천 년 이상을 존속한 몇몇 문명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다.

 

 역사학자들은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직접적인 이유 중 하나가 아나톨리아를 셀주크 투르크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비옥한 땅을 빼앗긴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쇠퇴일로를 걸어갔다.

 

 아나톨리아 고원 지대는 여름은 굉장히 건조하며 겨울에는 상당히 춥고 눈이 많이 오기로도 유명하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가 4월 초순이었는데 한낮이라도 해가 비치지 않으면 늦가을처럼 추웠다.

 

 나는 하루 전날 예약해 둔 도심의 호텔로 직행했다. 이스탄불을 떠난 이후 벌써 이 주가 넘게 텐트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동안 샤워도 못 하고 빨래도 못 했다. 나는 악취가 나는 거지 취급을 받지 않으면 다행인 불쌍하고 가련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게스트 하우스고 호텔이고 뭐고 다 문을 닫아버렸다. Couchsearfing이나 Warmshower를 통해 찾아낸 한 줌의 호스트들도 친절하게 답장은 해주었을지언정 나를 받아주진 않았다. 터키의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솟고 있던 때라 모두가 외부인을 두려워했다.

 

 그 와중에 기적적으로 발견한 호텔이었다. 숙박비가 하루에 3만 원으로 내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게 비쌌지만 나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3만 원이면 거의 일 주일치 여행 경비다.) 샤워나 빨래의 필요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내 아이폰 6s를 열 번이나 충전할 수 있는 27,000mAh의 대용량 보조 배터리가 거의 다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휴대폰의 지도를 포함한 여러 가지 앱 없이는 여행을 지속할 수 없었다.

 

 호텔에 도착했다. 잔뜩 긴장한 채로 문을 두드려 보았다. 대부분의 숙박시설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왜 이곳만?’ 이라는 강한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문은 열려 있었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로비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발견하더니 깜짝 놀라서 급히 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우리 영업 안 해요. 어서 나가 주세요.”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예약을 하고 왔어요.”
상관없어요. 어서 나가 주세요. 영업 안 합니다.”

 

 그의 등쌀에 떠밀려 문 밖으로 밀쳐 나온 나는 잠시 멍하니 호텔 정문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이 상황을 면밀히 파헤쳐 보았다.

 

 ‘문이 열려 있는데 영업은 하질 않는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내가 아시아 사람인 걸 보고 내쫒은 거 같아. 젠장할... 왠지 이럴 거 같더라. 어제 예약을 할 때부터 뭔가 많이 미심쩍었어. 일단 한 번만 더 사정해 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미리 지불한 돈이라도 돌려달라고 하자.’

 

 나는 문을 박차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쫒아냈던 직원이 나를 다시 저지하려고 들었지만 이번에는 나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예약을 하고 왔다고요. 돈까지 미리 지불했어요!”

 

 그는 내 단호한 태도를 보고 잠시 서성이더니 리셉션 안쪽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곧 사무실 안쪽에서 이 호텔에서 상당히 많은 재량권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우선 알코올이 섞인 레몬 향수를(비공식적인 터키의 상징, 레몬 향수!) 내 손에 뿌려주었다. 그러고서는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혼자서 여행하는지 얼마나 머물건 지 둥둥. 그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난 후 잠시 혼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곧 내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 이건 굉장한 청신호이다!’

 

 여권을 건네받은 그는 컴퓨터의 자판기를 두드려 예약 확인을 하고 나서 나에게 카드키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저 내가 지불한 대가에 아주 정확하게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았을 뿐인데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도 선물 받은 것 마냥 매우 기뻤다.

 

 호텔방은 조그마했지만 깔끔하고 필요한 모든 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더블 사이즈의 넓고 푹신한 침대와 깨끗한 이불, 작은 냉장고와 TV, Wifi, 완벽한 샤워 시설을 갖춘 화장실, 휴지 그리고 라디에이터까지. 그동안 쌓인 빨래라든가 노트북을 이용한 디지털 작업 등 밀렸던 일을 처리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장소는 없어 보였다.

 

 짐을 풀고 나서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터키에서 여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2013년 기준 207) 치고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거리가 굉장히 한산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지도 몰랐다.

 

 평소와 같으면 열심히 발품을 팔아서 도시의 이곳저곳 둘러 보아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도심의 차가운 분위기가 내 발을 동여맸다. 또한 이왕 오늘 하루 비싼 호텔에 머무는 거 여행 따위는 집어치우고 호텔에서 편안히 쉬고 싶었다. 다시 길을 나서게 되면 언제 또 이렇게 편안한 곳에 묵을 수 있을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서 토마토 1kg3리라(한화 500원 정도)라는 말도 안 되는 물가에 놀라며 먹을거리를 사고 곧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며 밀린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밤에 들개라든가 귀신 걱정 없이 푹 잘 수 있었다. (비록 유튜브를 보느라 늦게 자긴 했지만)

 

 정말로 간절히 바라던,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사실 콘냐에서 꼭 방문하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잘랄 웃 딘 루미의 영묘.

 

 '잘랄 웃 딘 루미'

 

 과연 이 위대한 시인이자 이슬람 법학자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가 의문이다. 나도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스탄불에서 이슬람의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라나교의 세마(Sema)라는 춤을 보러 갔다가 알게 되었다.

 

 세마는 내가 지금껏 보았던 그 어떤 춤보다도 더 인상적인 춤이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새빨간 장미보다 정열적이고 공작새의 깃털보다 현란한 그 플라멩코조차도 이 춤의 신비로움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 둘은 전혀 다른 형태의 춤이고 세마는 사실 춤이라기보다는 종교 의식에 더 가깝다.)

 

 의식을 행하는 수도승들은 텐누레(Tennure)’라 불리는 흰색 스커트를 입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회전을 계속하면서 그들은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진다. 자신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잊는다. 그리고 오직 신에 대한 경외감과 찬미의 마음만이 그들을 감싸 안는다.

 

 결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신비로운 춤 '세마'. 허나 내가 춤보다는 문학에 더 가까웠기 때문일까? 내게는 한 시간 가까이 관람한 세마 춤보다는 오 분 정도 살펴본 루미의 책 속에 적혀진 시가 더 아름답고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런 연유로 루미의 몇 가지 시와 인용문을 통해 이번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You have to keep breaking your heart until it opens
Doing as others told me, I was blind. Coming when others called me, I was lost. Then I left everyone, myself as well. Then I found everyone, myself as well.
You are not a drop in the ocean. You are the entire ocean in a drop.
여행은 힘과 사랑을 그대에게 돌려준다. 어디든 갈 곳이 없다면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보라. 그 길은 빛이 쏟아지는 통로처럼 걸음마다 변화하는 세계. 그 곳을 여행할 때 그대는 변화하리라.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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