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8.]
*바람 타고 찾아온 해프닝
-강을 따라 이어지던 푸른 산길을 한 시간 정도 달리고 나자 마침내 지중해가 보였다. 얼마 만에 보는 바다인지. 이스탄불 이후로 처음이니 대략 반년만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바다는 너무나도 넓었다. 반 호수나 아타튀르크 인공호수 따위가 아무리 넓다 할지라도 실제 바다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하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의 광활함은 대지의 모든 것은 물론 하늘마저도 품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날씨는 여름이 다시 찾아온 듯 푹푹 쪘다. 더위를 피해서 적잖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걔 중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히잡을 두른 여인들도 있다. 어떻게 저런 복장으로 물에 들어갈 수 있는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바다로 뛰어든다. 여름날의 온기를 가득 품은 시월의 바다는 무척이나 따뜻하다.
Samandag에서 Arsus로 이어지는 31-55 해안도로는 환상의 길, 그 자체였다. 호주 멜버른의 그레이트 오션 로드가 부럽지 않을 정도이다. 이곳은 터키에서 가장 인적이 드물고 교통량이 적은 해안도로임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가 있어서 더욱 쾌적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15km 남짓 달리면서 펑크가 세 번이나 났다. 튜브를 교체도 해보고 림과 타이어를 현미경 보듯 살펴보았지만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수리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마지막 수리를 마쳤을 즈음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야영 장소로 선택한 곳은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암석의 끝자락. 경치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멋지다. 내 평생 태평양과 지중해를 포함한 적잖은 바다를 보아왔지만 이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운 바다는 처음이다. 날씨가 좋았기에 오늘 밤은 텐트를 치지 않고 침낭에만 의지한 채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자기로 한다. 내일 아침, 여명과 동시에 눈을 떴을 때 눈앞에 펼쳐질 광경이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
그러나 내 여명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바람이 점점 심해졌다. 급기야 자정을 넘자 바람은 산마저도 날려버릴 만큼 흉폭해졌다. 나는 침낭 속에서 불안함에 몸을 뒤척였다. 아무리 바람이 강할지언정 누워 있는 사람이 바람에 날아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바람이 더 강해지자 내가 그 최초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이곳을 탈출해야만 했다.
부랴부랴 물건을 정리하는데 실수로 캠핑용 베개를 손에서 놓쳤다. 오랫동안 내 꿀잠을 책임져 준 베개는 마치 작별인사를 하듯 바닥을 몇 번 통통 튕기더니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 와중에 베로는 여전히 침낭 속에 누워 게슴츠레한 눈을 껌벅이며 "나는 여기 있을래. 가고 싶지 않아"라고 말한다.
조금 오래된 일이 떠올랐다. 필리핀에서 호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 앞에 앉아 있던 필리핀 여자가 승무원에게 물었다.
"저 속이 답답해서 그러는데 창문을 조금 열어도 괜찮을까요?"
살면서 많은 헛소리를 들어왔지만 그만한 헛소리는 또 처음이었다. 나는 뒤에서 남모르게 큭큭대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남자도 함께 큭큭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급박한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베로. 대체 뭘 보고 여기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찌되었든 베로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건 원치 않았던 나는 진심을 담아 그녀를 설득했다.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지만 바람의 위력은 전혀 수그러지지 않았다. 모래가 휘몰아치고 굉음이 들려오고 나무들은 미친 듯이 춤춰댄다. 내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파도마저도 다시 바다로 밀어낼 정도로 강력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버려진 폐건물에서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다. 어젯 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조금 헤메다가 이곳을 발견했다. 만약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런 날에 자전거를 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설상가상으로 자전거 뒷타이어는 또다시 펑크가 나있고 핸드폰은 불통이며 물통의 물은 거의 바닥을 보였다. 가장 가까운 마을은 이곳에서 15km 이상 떨어져 있다. 바람이 멎을 때까지 꼼짝없이 이 냄새나는 폐건물에 갇히게 된 우리. 상황이 이러할진대 놀랍게도 마틴과 베로는 내 옆에서 쿨쿨 자고 있다.
오후가 되자 마침내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뒷타이어 펑크 때문에 이동이 불가능했다. 마틴과 함께 고심한 끝에 펑크의 원인은 밝혀냈지만 수리를 위해서는 새로운 튜브가 필요했고 튜브를 구하기 위해서는 Samandag로 돌아가야만 했다. 대중교통이 전무한 이곳에서 Samandag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히치하이킹.
난생처음 시도한 히치하이킹이었지만 불과 오 분만에, 그것도 첫차를 얻어 탄다. 차에는 젊은 남자 한 명이 타고 있다. 과연 누가 터키 사람 아니랄까봐 그는 도무지 운전에 집중하질 않는다. 핸드폰을 만지고 자동차 오디오를 조작하고 담배를 피우고. 두 손이 핸들에 얌전히 붙어있는 꼴을 볼 수가 없다. 중앙선도 수시로 넘나들고 속력도 들쭉날쭉. 사실 더 놀랄 것도 없다. 터키에서 차를 얻어 탈 때마다 이러는 걸. 분명 외국인을 태워서 아주 신이 났을 테다. 만약 터키 남자들의 꿈인 금발의 외국 여인을 태웠다면 자동차가 하늘을 날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 혹시 한국에 아는 여자 있어?"
그러면 그렇지. 왜 안 물어보나 했다. 어쩜 터키 남자들은 다들 이렇게 한결 같을까. 대충 얼버무려 보지만 운전을 발로만 하는 신기를 보여주면서 집요하게 물어보길래 인터넷에 떠도는 여자 사진을 보여준다. 사진을 보더니 남자는 대단히 좋아한다. 그러더니 당장 전화를 걸라고 한다. '전화를 걸라고! 적당히 해, 이 인간아! 말도 안 통하는데 전화해서 어쩌려고? 게다가 너 운전 중이잖아?' 여하튼 여자를 향한 터키 남자의 불타는 열정과 근거없는 자신감만큼은 정말 인정해줘야 한다.
반나절 동안 Samandag의 모든 자전거 가게를 방문한 끝에 나는 적당한 튜브를 찾을 수 있었다. 개인적인 볼일을 보기 위해 Samandag에 와있던 마틴과 합류할 때쯤은 이미 주위가 어둑해진 후였다. 우리는 돌아가기 위해서 다시금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하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별다른 소득이 없다. 지나가는 차가 거의 없을 뿐더러 이 야심한 밤에 꼬질꼬질한 남자 두 명을 태워줄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거 같았다.
포기하고 가로등 하나 없는 15km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찰나, 택시 한 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우리는 미친 사람처럼 양손을 흔들어 보지만 곧 부질없는 짓이라는 깨닫는다. 택시에는 이미 사람이 타고 있다. 한데 우리를 그냥 스쳐 지나갈 줄 알았던 택시는 어쩐 일인지 우리 앞에 멈춰 선다. 창문이 스르륵하고 열리더니 보조석에 탄 남자가 말한다. "타!" 그렇게 우리는 택시를 히치하이킹했다.
택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전조등 하나에 의지한 채 달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 10시가 넘어 있다. 마틴과 나는 폐건물에 혼자 남은 베로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베로는 히치하이킹으로 남미 전역을 여행했을 정도로 용감하고 강한 여자이다. 별일이야 있겠냐만은 그래도 세상 일이란 알 수 없는 법. 나는 어서 빨리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마침내 폐건물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어두워야 할 폐가 주위가 야구장처럼 환했던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가 보니 베로는 열댓 명의 잔다르마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잔다르마의 손전등에서 나오는 하얗고 밝은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그녀의 얼굴에는 코너에 몰린 똥강아지처럼 당혹감이 역력했다. 잔다르마가 말했다.
“당신들 우리와 함께 당장 Samandag로 가주셔야겠습니다.”
택시를 히치하이킹 하면서까지 Samandag에서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다시 돌아가라니? 우리는 잔다르마의 명령을 거절했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다수에 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강제로 연행(?)되었고 자전거와 함께 승합차 화물칸에 몸을 실었다. 강철로 된 뒷문이 쾅하면서 닫혔다. 앞을 보자 두꺼운 쇠창살이 운전석과 우리가 탄 화물칸 사이를 분리하고 있었다.
불과 반시간 전에 지나왔던 길을 다시 달려서 도착한 곳은 Samandag의 잔다르마 본부였다. 그곳은 6m가 넘는 높은 담과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입구 초소에는 완전무장을 한 군인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거대하고 두꺼운 자동 철문이 천천히 열리자 엄청나게 넓은 부지와 특색 없는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차는 건물 앞에 멈췄고 우리는 곧 건물의 안쪽 깊숙한 곳으로 안내된다. 혹시나 모를 도망을 방지하려는 듯 앞뒤로 잔다르마가 우리를 따라온다.
‘대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마침내 도착한 널찍한 밀실에는 어떤 아저씨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어깨 견장에는 별 두 개가 반짝이고 있다. 직위가 말해주듯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인상을 가진 아저씨다. 우리를 보고 별 두 개 아저씨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Welcome to Turkey! 차이?”
터키에서 누군가에게 차이를 권유받은 후 난처했던 적은 이스탄불에서 빌어먹을 양탄자 장수의 꼬임에 넘어갔을 때 딱 한 번 뿐이었다. 그 외에 차이는 마치 평화와 우정의 상징이라도 된다는 듯 언제나 나와 터키 사람들 사이의 허물을 벗겨주었다. 이 본부의 최고책임자인 별 두 개 아저씨는 우리를 크게 환영해 주었다. 차이를 마시며 우리의 신원 조회를 마친 그는 우리에게 햄버거를 사주고 근처의 호텔방을 제공해 주는 등 큰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정도로 격한 환영을 받을 진 몰랐지만 나는 잔다르마를 만났을 때부터 일이 잘 풀릴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여행하면서 잔다르마에게 도움을 받은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나는 잔다르마가 좋았다. 그들은 언제나 내게 따뜻한 차이를 대접해 주었다. 때로는 구원투수가 되어 곤란한 일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잔다르마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방에 도착했을 때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호텔방은 화장실로 쓰이던, 그 냄새나는 텅 빈 폐건물과는 달리 멀쩡한 지붕과 창문이 있고 안락한 침대가 있었다. 나는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고 곧 잠이 들었다.
터키(페티예 ~ 보드룸 ~ 이즈미르) - 이즈미르 탐방 (0) | 2022.05.17 |
---|---|
터키(아나무르 - 세리크) - 바나나 로드 (0) | 2022.04.30 |
터키 - Lake Hazar 가는 길 (0) | 2022.03.09 |
터키(Nusaybin ~ Ortakoy) - Why are you doing this? (0) | 2022.01.30 |
터키(미드야트 ~ 베야즈수) - 억 만금보다 더 가치 있는 호의 (1) | 2021.11.0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