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2.]
*아네무리움 고대 도시
*바나나 로드
-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텐트에서 나와 아네무리움 고대도시(Anemurium Ancient city)로 발걸음을 옮긴다. 청명한 하늘 아래 선선한 바닷바람이 부는 기분 좋은 아침이다. 나는 해안가 여기저기 흩어진 아네무리움의 유적지를 하나씩 따라가다가 잠시 길을 잃기도 했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다.
여명에 비친 아네무리움 고대도시는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다. 그 색감이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해서 이곳이 버려진 도시이자 무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래전에 폐허가 된 이 도시는 오직 죽음만이 가져다주는 영원한 평온을 간직하고 있었다. 도시의 수많은 건물들 중에서 몸 성한 건 단 하나도 없었지만 그것들은 마치 나무나 풀, 돌과 같이 자연의 일부로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입구에는 안내 표시판이 있을 뿐 사람의 기척이 없다.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아니면 원래 입장료를 받지 않는 건가? 안으로 들어가니 네다섯 명의 복원사들이 앙상한 뼈만 남은 교회의 복원 작업에 한창이다. 아침 일찍부터 일을 시작하는 건 훌륭하나 저 인원으로 이곳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면 어쩌면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무언가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원가 스스로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듯 그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기원전 4세기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진 이 고대도시는 셀추크의 에페소스처럼 한때는 수많은 선박들이 오고 가는 로마의 번성한 항구 도시였다. 도시는 한눈에 보아도 절묘한 곳에 세워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깎아지른 절벽이 자리 잡은 뒷산과 아나무르 곶은 북쪽과 동쪽에서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는 천연의 장애물 역할을 해주었고 그 외에는 견고한 성채와 성벽으로 만들어 방어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튼튼한 도시라 해도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 도시는 로마의 쇠퇴와 함께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슬람이 대두하는 7세기경, 아랍 세계의 공격으로 결국 몰락하고 만다. 도시가 몰락한 후, 도시의 건물을 이루는 돌과 대리석 등이 근처의 사이프러스 섬 등에 의해 끊임없이 약탈을 당하는 등 갖은 수난을 겪는다. 그 결과가 공중폭격을 당한 마을처럼 형태만 겨우 남은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네무리움 고대도시는 내가 그동안 방문했던 그 어떤 유적지보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보존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껏 보아온 유럽과 터키의 유적들 중에는 이보다 훨씬 훌륭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난 왜 이 폐허가 된 도시가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걸까? 그 이유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까 보았던 복원사들을 제외 하면 이 유적지를 거닐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자동차 소리라든가 핸드폰 울림소리 등 그 흔한 기계음 하나 들려오지 않는 적막함 속에 난 홀로 이 고대도시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과거에 3,000명을 수용했다는 극장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로마가 자랑하는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왔다는 대중목욕탕에서는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를, 300개가 넘는 네크로폴리스(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뜻)에서는 망자들의 곡소리를 들었다. 그건 미어터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단순히 눈만 즐거웠던, 콜로세움이나 포로 로마노에서 얻은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옛 시대를 걷고 있었다. 먼 옛날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도 그랬듯이, 오직 불어오는 바람과 밀려오는 파도 소리만이 나와 함께였다.
“너희들 지금 아침 먹을 때가 아니야. 아네무리움 유적지 꼭 보고 와야 해. 진짜 멋진 곳이야. 게다가 공짜라고!”
텐트로 돌아온 나는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있는 마틴과 베로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나만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유적이었다. 내 설득에 못 이겼는지 아니면 흥미가 돋았는지 그들은 유적을 보고 온단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돌아왔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그거 공짜 아니던데? 갔는데 입장료를 받더라고. 그래서 그냥 왔어.”
알고 보니 입장료를 받는 입구는 따로 있었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본의 아니게 샛길로 입장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입장료를 내었더라면 모든 게 달라 보이지 않았을까? 아네무리움 고대 유적지가 그리도 인상 깊었던 진짜 이유는 어쩌면 남들은 돈을 내는데 나는 공짜로 보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 여유롭고 충만했던 아침과는 달리 오늘 우리에게는 큰 과제가 주어졌다. 마틴은 D400도로를 타고 가지파사(Gazipasa)까지 단숨에 치고 가자는 제안을 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가지파사까지는 80km 정도의 거리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해발 300m 산 하나와 해발 500m의 산 두 개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산길의 초입부터 7%의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급기야 길이 더욱 가팔라지더니 자전거에 내려서 밀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땡볕 아래 진땀을 빼야 했고 다리는 벌써부터 후덜덜거렸다. 해안가의 산길은 이게 문제다. 분명히 경치는 좋지만 때때로 이런 급경사가 나타나 우리를 한순간에 지치게 만든다는 점, 그리고 크고 작은 오르막 내리막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 큰 단점이다. 오르막길의 끝에 있는 노점상에 도착했을 때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이란 한 잔을 시킨 후 손수 샌드위치를 만들어 점심을 때웠다. 내가 말했다.
“아무리 봐도 오늘 안에 가지파사 가는 건 힘들 거 같은데.”
“단숨에 정상까지 올라가면 좋은데 오르락 내리락해야 하는 게 압박이긴 하네.”
“젠장할. 지그재그로 올라가면 그나마 덜 힘든데 차들이 많아서 그렇게 탈 수도 없고.”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고.”
천근만근 무거운 엉덩이를 억지로 떼서 출발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갑자기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추어 섰다. 그 트럭을 보자마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트럭이 왜 멈춰 섰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몇 분 후, 우리 셋은 트럭의 화물칸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아나무르 지방은 바나나 재배가 유명한 만큼 주위에는 바나나 농가가 가득했다. Yakacik이라는 마을을 지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바다를 제외하면 시선이 닿는 곳에는 온통 바나나 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몇 채의 집들과 모스크, 비닐하우스만이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처럼 바나나 나무들 사이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바나나 재배는 강도 높은 노동을 요구한다. 종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바나나 열매는 그 무게가 대략 30~60kg이나 한다. 열매의 무거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나무가 부러지기까지 할 정도이다. 이걸 나무에서 자르고, 트랙터에 싣고, 작업장으로 옮기고, 크기에 맞게 잘라서 분류하고, 세척하고, 박스에 포장하기까지는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내가 이번 여행의 여비를 호주의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면서 벌었기에 이 고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왕 바나나 얘기가 나온 거 그 시절 나와 함께 일했던 바누아투(Vauatu) 섬에서 온 흑인 친구들 얘기를 조금만 해보자. 언젠가 나는 바누아투인 네 명이 공동생활하는 숙소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우연히 숙소에 하나 있는 냉장고 문을 열게 되었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500리터짜리 냉장고는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오직 물과 식빵, 우유만이 냉장고의 넓은 칸 하나를 독차지하면서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각자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먹는 점심시간에 그들은 항상 빵이랑 우유, 그리고 바나나만 먹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 특히 나를 포함한 대만, 일본 등 아시아에서 온 친구들의 도시락 메뉴는 거의 매일 바뀌었기에 그게 묘하게 대조가 되었더랬다. 그래도 내심 ‘점심은 저렇게 형편없이 먹어도 일 끝나고 집에 가면 잘 먹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힘이 좋다는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바나나를 따고 옮기는,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바누아투 친구들이었다. 누구보다도 잘 먹어야 할 텐데 고작 이런 걸 먹으면서 그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니. 물론 그들은 평소에 무료로 제공되는 바나나를 엄청나게 먹고 있었다. 평범하게 먹는 건 물론이거니와 오븐에 구워서 먹고, 튀겨서 먹고, 셰이크로 먹고, 심지어는 삶아서도 먹고. 그들은 그렇게 바나나만을 먹으면서 아끼고 저축한 돈을 가지고 섬에 돌아가 자동차를 사고 집을 사고 그리고 땅을 산다고 했다.
한 국제기관에서 2014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터키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약 삼십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바나나 재배의 특성상 분명히 이 마을에도 적잖은 외국인 노동자가 있을 거 같았다. 눈앞에 펼쳐진 이 거대한 바나나 숲 어딘가에서 고향을 그리며 일하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짠해졌다.
(대한민국 농촌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Yakacik 마을을 벗어나는 Z자 모양의 비탈길에는 차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언덕의 경사가 상당해서 선두의 트럭이 고생을 좀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언덕을 다 오르고 나자 성질 급한 터키의 운전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둘 중앙선을 넘어 트럭을 앞질렀고 내친김에 선두까지 내달렸다. 포뮬러 원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의 트럭은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마틴과 베로에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 트럭은 다른 차들과 달리 앞지르기를 하지 않네. 길도 좁고 위험한데 역시 안전하게 가는 게 최고지.”
하지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트럭은 부르릉하고 굉음을 내더니 앞차를 추월하기 시작한다. 한 번 추월하기 시작한 트럭은 추월하고 또 추월하고 또 추월한다. 포뮬러 원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이건 ‘분노의 질주’나 다름없다. 다행히 내 시선은 후방을 향하고 있어서 필시 전방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는 끔찍하고 아슬아슬한 장면들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울렁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 80km를 목표로 달리기 시작한 우리는 트럭을 타고 120km 더 달려서 안탈리아 근처의 세리크(Serik)까지 왔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하지 못할 거 같다. 가파른 산길도 산길이었지만 가지파사부터 세리크까지의 길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으니까. D400도로 주위에는 호텔과 리조트, 주유소, 쇼핑센터가 가득했다. 지구촌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가장 특색 없는 풍경이자 오직 돈 많은 관광객들만을 위한 장소. 우리는 이런 곳에 아무런 볼일이 없었고 또한 이런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사방이 뻥 뚫린 트럭 화물칸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 모든 걸 바라보는 건 오픈카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터키(페티예 ~ 보드룸 ~ 이즈미르) - 이즈미르 탐방 (0) | 2022.05.17 |
---|---|
터키(31-55 해안 국도) - 바람 타고 찾아온 해프닝 (0) | 2022.04.21 |
터키 - Lake Hazar 가는 길 (0) | 2022.03.09 |
터키(Nusaybin ~ Ortakoy) - Why are you doing this? (0) | 2022.01.30 |
터키(미드야트 ~ 베야즈수) - 억 만금보다 더 가치 있는 호의 (1) | 2021.11.0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