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6. ~ 11. 15.]
*이즈미르 가는 길
*이즈미르 탐방
- 페티예에서 보드룸(Bodrum)을 경유하여 이즈미르(Izmir)까지 가는 길은 순탄했다. 지중해는 아무리 보아도 결코 질리지 않는 천혜의 바다였다. 지중해 주변의 마을은 마치 동화 속에서 끄집어낸 듯 하나같이 아름답고 깨끗했다. 식물을 기르고 화초를 가꾸는 일이 이곳 주민들의 주된 일상인지 집집마다 푸른빛이 가득하고 과실이 맺히고 꽃이 피어 있어 내 눈을 즐겁게 했다.
특히 보드룸은 하얀 도화지에 위에 숲을 그려놓은 듯한 도시였다. 콘크리트와 식물이 이처럼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도시는 처음이었다. 조용한 주택가를 정처 없이 걸으며 담장 너머로 보이는 집들의 예쁜 정원을 엿보고, 길고양이와 눈빛을 교환하고, 주민들이 이곳저곳 꾸며놓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구경하는 건 기쁨 그 자체였다.
나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여러 명의 자전거 여행자들을 만났고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셀축에서는 거진 일 년 만에 한국인을 만났다. 인석 군은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여행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길 위에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이웃 나라 조지아에서 반년 가까이 지냈다는 그는 조지아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었고 나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사진에 단번에 매료되었다. 인석 군 앞에서 나는 마치 댐이 터진 듯 수많은 말들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오랜만에 한국어를 쓸 수 있다는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이십 대 중반의 인석 군은 여행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여담이지만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전 세계를 여행 중이다. 나는 그런 그의 용기와 행동력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그의 밝은 미소만큼이나 좋은 일들이 여행길에 가득하기를 기원했다.
언제든 내가 원하면 쉬어갈 수 있는 여유로운 여행길이었지만 밤마다 나에게 골칫거리가 찾아왔다. 밤이 되면 어딘가에서 미친 듯이 짖기 시작하는 들개들 때문에 나는 몇 날 며칠 동안 잠을 설쳐야 했다. 지중해 주변의 들개들은 아나톨리아 고원의 들개들과는 달리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녀석들이 그렇게 몰려다니며 밤마다 마녀사냥을 하거나 패싸움을 하며 소란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던 나는 텐트를 박차고 나와 눈에 보이는 짱돌을 집어 들었다. ‘어디 한 번 걸리기만 해 봐라’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나는 바로 꼬리를 내려야 했다. 내 앞에는 터키의 국견인 캉갈만큼이나 거대한 들개 몇 마리가 어둠 속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돌을 내려놓고 들개를 타일렀다.
“방해해서 미안. 너희들 할 거 해. 나는 다시 들어가서 잘게. 안녕.”
-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세속적인 도시라고 알려진 이즈미르에 도착했다. 이즈미르 도심 외곽에 사는, 웜샤워 호스트인 오잔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제 막 서른이 넘은 그는 대학생인 여동생 딜란과 함께 작고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작다고 해도 주방과 거실이 있고 손님 한 명이 머무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터키도 땅덩어리가 크다 보니 집들이 우리나라의 집보다 비교적 큰 편이었다.
오잔은 한동안 실직 상태였다가 두어 달 전부터 환경 엔지니어로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에 12시간씩 일주일에 6일 그리고 가끔 쉬는 날도 일한다는 그의 모습은 매우 피곤해 보였다. 그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 도시의 삶에 지쳐 있었다. 반면 딜란은 대학교 졸업을 앞둔 상태로 취업 걱정이 산더미였다. 터키는 가뜩이나 곤두박질친 경제난에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면서 최악의 실업난을 겪고 있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의 실업률이 높았다.
장내에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지만 그래도 오잔은 내가 와주어서 기쁘다고 했다. 웜샤워 같은 플랫폼을 통해 여행자들을 맞이하는 건 반복되는 일상에 찾아오는 소소한 낙이란다. 오잔 또한 언젠가 나처럼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그런 말이 있거든. 여행자는 호스트 집에서 편히 머물면서 현지 문화를 배우잖아? 호스트는 여행자를 집에 초대함으로써 세상 전체를 초대하는 거라고. 세상을 배우는 거라고.”
다음 날 오잔은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나에게 이즈미르 구경을 시켜주었다. 우리는 먼저 버스를 타고 ‘Buca Şahin Tepesi’에 올라 이즈미르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즈미르는 터키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인만큼 오밀조밀 모여 있는 집들이 인상적이었다. 오잔은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며, 보르노바(Bornova)라고 불리는 저 지역이 얼마 전 지진이 일어났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라고 말했다.
2020년 10월 30일에 일어난 진도 7.0의 에게해 지진은 이즈미르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고 재산 피해를 입었다. 집을 잃거나 아니면 끊이지 않은 여진으로 인해 집에 머무는 게 불안했던 사람들은 아직도 주변 공원에 마련된 임시 텐트에서 지낸다고 했다. 이렇게 이즈미르에 설치된 임시 텐트의 수만 무려 2,700개나 되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나 또한 비교적 진앙지와 가까운 데에 있었다. 마틴과 베로는 방금 작은 흔들림을 느꼈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서 웃으며 넘어갔다. 하지만 그 당시 누군가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깔려 오직 구조만을 기다리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런 일이 나에게 닥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라시아판, 아프리카판, 아라비아판의 경계에 위치한 터키는 크고 작은 지진이 꾸준히 일어났다. 1999년 이즈미트 대지진, 2011년 반 지진 등은 인명과 재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터키 동남부를 여행할 때, 엘라지(Elazig) 주의 시브리제(Sivrice)라고 하는 작은 마을을 지났던 기억이 난다. 마을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폐허와 다름없었고 대규모의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이 피해의 원인이 2020년 1월에 일어난 엘라지 지진이라는 걸 알았다.
“오잔. 너는 지진이 무섭지 않아?”
“무섭지. 근데 어쩌겠어. 여기가 우리의 삶의 터전인걸. 무서워도 견디면서 살아야지. 뭐 맨날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다시 버스를 타고 코낙 광장(Konak Square)의 이즈미르 시계탑을 찾았다. 이즈미르 시계탑은 이즈미르의 몇 안 되는 구경거리 중 하나이지만 그리 흥미로운 건축물은 아니다. 차라리 시계탑 주변에서 비둘기와 함께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게 더 신이 난다.
광장 주위에는 ‘Karabakh is Azerbaijan!!!’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제르바이잔 국기 또는 터키 국기를 망토처럼 몸에 두르고 있는 걸로 봐서는 그들은 아제르바이잔 사람이거나 최소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는 터키인일 거라고 추측된다. 아제르바이잔 국기의 중심부에는 빨간색 바탕에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 있는데 그 모양이 꼭 터키의 국기와 닮았다. 카라바흐(Karabakh)를 두고 일어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영토 전쟁이 이제 막 끝난 시점에서 이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승리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터키가 전폭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했으니 말이다.
중앙아시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튀르크 계열 민족 중에서도 아제르바이잔은 특히나 터키와 가까운 사이다. 민족, 언어, 문화, 종교 등 많은 부분에서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의 진정한 형제의 나라이다. 사실 카스피해를 건너면 있는 우즈베키스탄이나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도 여러 가지 면에서 형제의 나라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지만 사용하는 언어가 약간의 차이를 만든다. 터키를 포함한 앞에서 언급한 나라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언어를 쓰기에 조금만 공부하면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지만 터키어와 아제르바이잔어는 개와 늑대만큼이나 서로 비슷한 언어이다. 대체로 별도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케메랄티 시장(Kemeralti Market)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생선구이를 먹었다. 그리고 나자르 본주가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찻집 골목에서 차이를 마신 후, 맥주를 마시러 알산칵(Alsancak)으로 향했다. 수많은 식당과 카페, 바, 나이트클럽, 상점 등이 즐비한 알산칵 거리는 이즈미르에서 젊음의 열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 중 하나이다. 해 질 무렵, 어두운 골목에 있는 바에 들어선 우리는 이 층 카운터에 자리를 잡고 맥주와 감자튀김을 시켰다.
일 층에는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서 라이브 공연이 한창이었다. 귀에 익숙한 영미권의 대중가요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3인조 가수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몸을 흔들며 맥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었다. 과연 이즈미르는 터키에서 가장 세속적인 도시답게 이곳은 개방적이고 개성 넘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성들은 제이넵 바스틱(Zeynep Bastick, 터키 가수)처럼 세련되게 아름다웠으며 멋진 금발의 여성이나 담배를 피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낭만이 넘치는 연인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곳은 서양보다도 더 서양 같은 곳이었다.
집에 돌아오자 딜란은 주방 식탁에 앉아 못해도 이천 페이지는 넘을 거 같은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앞표지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적혀 있다. 그녀는 흑해로 간다는 내 말을 듣고는 ‘가이아, 가이아(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신이자 지구를 뜻하는 그리스어)’라며 흥분을 나타냈다. 흑해는 수풀이 우거지고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멋진 곳이란다. ‘그런 곳이라면 대환영이지!’라고 좋아하는데 오잔이 찬물을 끼얹는다.
“근데 지금 이 시기에 가면 일주일 내내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흑해 지역은 일주일 내내 비 혹은 흐림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젠장할.
(안타깝게도 터키 경제는 현재 위기에 봉착해 있다. 에르도안 집권 이후 고도 성장하던 터키의 경제는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와 코로나의 여파로 인해 바닥이 안 보이는 절벽으로 추락 중이다. 터키 친구들에게서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극심한 경기침체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에서 '자살은 유일신 알라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엄중히 금지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 지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지역 주민의 삶이 점점 팍팍해지는 와중에 그들은 과연 이 많은 난민들을 도와줄 여유가 있을까? 팔은 결국 안으로 굽게 된다는데 경제 위기로 인해 난민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부디 터키에 거주하는 난민들이 지역 사회에 평화롭고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기를 바란다.)
터키(아나무르 - 세리크) - 바나나 로드 (0) | 2022.04.30 |
---|---|
터키(31-55 해안 국도) - 바람 타고 찾아온 해프닝 (0) | 2022.04.21 |
터키 - Lake Hazar 가는 길 (0) | 2022.03.09 |
터키(Nusaybin ~ Ortakoy) - Why are you doing this? (0) | 2022.01.30 |
터키(미드야트 ~ 베야즈수) - 억 만금보다 더 가치 있는 호의 (1) | 2021.11.07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