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11. ~ 9.14.]
*Lake Hazar 가는 길.
-날이 밝고 우리는 마침내 ‘Bozova 휴양 공원’을 떠났다. 일주일 만에 자전거를 타는 거라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현재 기온은 섭씨 40도. 매우 건조해서 숨만 쉬어도 입안이 바짝 마른다. 떠난 지 삼십 분도 채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Bozova 휴양 공원이 그리워진다.
E99 도로를 따라 Siverek으로 가는 길에 목가적인 풍경이 나를 반긴다. 수확이 끝난 옥수수밭의 생기 없는 노란 잎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나에게 인사를 한다. 태양이 떠오르자 생기 없던 노란 잎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반짝인다. 옥수수밭을 지나자 아몬드 과수원이 나온다. 마침 사람들이 작대기로 나뭇가지를 쳐가며 아몬드 수확에 한창이다. 지나가는 우리를 발견한 그들은 잠시 일을 멈추고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 준다.
다음 날 Siverek에 도착한 우리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금발의 호주 여성을 만났다.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오 년째 살고 있다는 그녀는 이 마을에 아주 질려 버렸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는 정말로 끔찍해. 사람들이 나를 등쳐먹으려고 하지 않나, 종일 치근덕대지 않나. 너희들은 여행하면서 별일 없었어?”
사실 우리들의 터키 동부 여행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친절한 사람들과 멋진 풍경, 맛있는 음식, 이외에 뭘 더 바라겠는가?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여자 혼자서는 터키 동부 여행이 쉽지 않겠지. 여자 혼자라면 남자들이 던지는 추파를 하루에 100번씩은 견뎌내야 한다. 특히 당신이 금발이라면 말이다. 오스만 제국 술탄의 여성 편력을 계승한 터키 남자들은 금발의 여성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문득 어떤 미국 여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터키 서부의 이즈미르로 왔을 때 저는 너무 행복했어요. 근데 이즈미르에서 터키의 동부로 갔을 때 저는 펑펑 울었어요. 이런 곳에서는 하루도 못 살 거 같더라고요.”
그녀와 짧은 만남 후, 우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잠시 쉬기 위해 ‘Siverek 성’을 찾았다. 그런데 성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당최 성이 보이지 않는다. 돌무더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한 바퀴를 둘러 본 베로는 농담 삼아 말했다.
“터키에서는 돌 두 개만 쌓아놓아도 성이라고 부르는 거 아닐까?”
훼손된 채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 유적지의 모습은 사실 터키 동부의 자화상이나 다름 없었다. 터키의 동부는 사람들의 삶도 건물도 유적지도 빈곤과 낙후로 색칠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의 친절과 호의가 유난히 가슴에 와닿는 걸지도.
Siverek을 떠난 후, 휴식을 취하려고 잠시 들린 슈퍼마켓에서 우리는 차 대접을 받았다. 차를 대접해 준 쿠르드족 남자는 자신은 아내가 둘이고 자식이 13명이나 있다고 한다. 남자는 베로에게 아르헨티나에서도 일부다처제가 있는지 물어본다. 페미니스트인 베로의 답변이 참 기발하다.
“아내를 둘 갖고 싶으면 가지면 되지. 대신에 우리들도 두 명의 남편을 가질 거야.”
쿠르드족 남자는 베로에게 ‘그럼 안돼’라고 답하면서 그건 오직 남자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옆에 있던 호자는 그에 대한 근거를 설명해 준다. 남자의 영혼의 일부에는 알라가 있기에 남자는 아내를 둘 이상 가져도 된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동시에 둘 이상의 남편을 갖는 여자는 알라의 분노를 마주하게 되리라.
터키는 1926년 세속주의를 내세우며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금지했으나 터키 동부에서는 여전히 일부다처제가 간간이 행해지고 있다. 사실 일부다처제가 되었든 일처다부제가 되었든 가족 구성원만 행복하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으리? 알라께서도 분명 사랑과 화목이 넘치는 가정을 바라실 텐데 말이다.
저녁노을 어스름, 우리는 지붕이 없는 폐건물 안에 텐트를 치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수박 파티를 열었다. 불과 한 시간 전, 작은 마을을 지나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어떤 남자가 우리에게 수박을 두 통이나 주었다. 호빵맨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수박이었기에 운반하느라 고생을 했지만 마음만큼은 가벼웠다. 한데 어째 이런 일이! 그 맛있는 터키의 수박은 어디 가고 이 수박 정말이지 맛대가리가 없다. 게다가 씨가 얼마나 많은지 이게 씨박인지 수박인지 모를 정도다.
그날 나는 난생처음으로 인공위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별똥별 내지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 베로가 저건 인공위성이라고 알려주었다. 인공위성은 밝은 빛을 내뿜으며 빠른 속도로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나저나 지구의 궤도에는 약 6,000개의 인공위성이 있다고 하는데 왜 서울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걸까? 아니지, 서울에 살 때 밤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본 적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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