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 독일 (2019.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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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라인강을 따라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던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다.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는 유럽이지만 전 국토가 거미줄처럼 자전거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4차선 메인 도로에 딸린, '아피아 가도'만큼 넓은 갓길을 달리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을 가로지르는 일반국도가 나타났다. 차량 이동은 적었지만 고작 이차선인 차선은 갓길 없이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나는 불가피하게 뒤에서 오는 차들을 가로막게 되었다.
괜히 나 때문에 생기는 교통정체로 운전자들이 화를 내지 않을까 조바심을 느꼈다. 하지만 운전자들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뒤따라 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다. 어느 누구 한 명 빵빵거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맞은편에 차가 오지 않을 때 슬그머니 나를 추월한다.
다들 이 상황이 밥 먹는 거 마냥 익숙하거나 아니면 부처님만큼 참을성이 많은가 보다. 적어도 오늘 안에 무조건 배달을 끝장내야 하는, 화물칸에 가득 실은 택배가 있다거나 직장보스가 빨리 오라고 닥달하는 상황은 아닌 게 분명했다.
오히려 이 상황이 익숙치 않은 건 나 자신이다. 줄 지어서 뒤따라 오는 차들을 보자니 뒤통수가 따갑고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결국 나는 마음 속의 찝찝함과 미안함을 이기지 못 하고 이따금 자전거를 멈추어 뒤따라 오는 차들을 먼저 보냈다. 그러고 난 후 다시 자전거 타기를 반복해가며 나아갔다.
그러는 와중에 맞은편에 마치 90년대 명절을 맞아 자동차들의 귀가행렬을 보는 듯 수많은 차들이 줄 지어서 매우 느린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무슨 일이지?'
내 의문은 금새 풀렸다. 단 한 대의 자전거가 선두에서 자랑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수많은 차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을 만들어가며 자전거 속도에 맞춰 달리고 있었다.
'미쳤다! 이건 진짜 미쳤다.'
내 눈을 의심했다. 우리나라같으면 너도 나도 다함께 백만 번은 빵빵거렸을 이 상황에서 누구 한 명 빵빵거리지 않는다. 더욱이 놀라운 건 뒤따라 오는 장렬한(?) 차들의 행렬에도 콧방귀도 뀌지 않는 라이더였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이 아저씨는 유유자적 자기 갈 길을 갔다. 비켜줄 생각 따위는 머릿속에 벼룩만큼도 있지 않은 거 같았다.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치기는커녕 점점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 맞는 날씨로 인한 대재앙이었다.
이렇게 쏟아지는 비 앞에서는 우비도 큰 소용이 없다. 애초에 2만원 짜리 방수잠바에 뭔 기대를 하겠느냐만은 빗속에서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자 팬티까지 홀딱 젖었다.
빌어먹을 비는 오후 늦게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간이 버스 정류장 지붕 밑으로 들어갔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아가며 빵을 먹고 있자니 내 처지가 참 가련해졌다. 물에 빠진 생쥐도 나를 본다면 '아이구, 가련해라.' 라고 말했을 것이다.
마침내 빗줄기가 잦아들기 시작할 때 쯤 불행히도 또 다른 대재앙이 닥쳤다. 펑크였다. 불행은 한꺼번엔 찾아온다더니 그 말이 꼭 맞다.
해가 슬슬 저물기 시작한 지라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아침에 고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망할 놈의 서유럽답게 좀처럼 캠핑할 장소가 발견되지 않았다.
뒷바퀴는 마침내 바람이 빠질대로 빠져서 굴러가기를 거부했다. 펌프를 꺼내 바람을 넣고 다시 자전거를 탔다. 200m쯤 갔을까? 다시금 바람이 빠졌다.
짜증이 확 솓구쳤다. 자전거를 저기 논두렁이로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 자전거는 너무 무거웠다. 그 자리에서 바로 펑크패치를 할 수도 있었으나 뭔가 쓸데없는 오기가 생겼다.
'그래!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그렇게 지금껏 내 평생 해 온 펌프질보다 더 많은 펌프질을 한 끝에서야 겨우 텐트를 칠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하루종일 내린 비로 인해 아~~주 수분을 가득 품은 낙엽들이 무성히 깔린 곳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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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그 다음 날은 비가 오지 않았고 나는 자전거를 수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 도착했다.
수리를 하는 도중 호주에서 10달러 주고 산 내 휴대용 펌프가 진짜 쓰레기라는 걸 깨달았다. 최대 70psi까지 바람이 들어가는 타이어인데 35psi도 안 들어가는 거 같다. 구입 당시, 어쩌다 보니 한 시간 씩 기다리는 수고를 하면서 산 휴대용 펌프인데 개똥만도 못하다.
그래서 찾아간 자전거 가게. 나를 반긴 건 턱수염이 복실복실한 내 또래의 직원이었다. 심술궂은 첫인상과 달리 이 친구, 곰돌이 푸우처럼 귀엽고 착하다.
그는 자전거에 바람 넣는 거를 도와주는 한편 휴대용 펌프에 대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그리고 못 쓰게 된 튜브를 한 토막 잘라주며 타이어 수리라든가 물건을 고정하는 등에 쓸 수 있다며 설명을 해 준다. 흐음~ 생긴 거와는 달리 귀엽고 친절한 녀석 같으니라고.
자전거 가게를 나와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페달을 밟아 나갔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유명하다. 무려 약 650년 전인 1385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오래된 대학이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에 찾아갔다.
주말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여름방학 중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 안은 뜨거운 여름날의 스키장처럼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몇몇 학생들만이 촐랑촐랑 지나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장구한 역사와는 달리 건물들이나 분위기 등 모든 게 그리 특출나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실망감을 안은 채 발길을 돌려 구시가지를 찾아갔다. (내가 갔던 곳은 새로운 캠퍼스였고 구 캠퍼스는 구시가지에 있었다.)
'여기는 관광도시인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없어?'
의문을 가지며 자전거를 타는데 이게 웬걸? 뭔가가 이상하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운이 끝내주게 좋았다. 매년 9월의 마지막 일요일은 하이델베르크 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오늘이 축제날인 줄 몰랐던 나는 뜻하지 않은 횡재라도 한 듯 신이 났다.
구시가지는 지역 주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전국 각지, 유럽 각지,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무려 3유로나 하는 소세지를 산 후 광장 중앙에 설치된 좌석에 앉았다. 바로 앞에는 무대가 있었고 관현악단의 연주와 함께 독일전통민요인 거 같은 노래가 흘렀다.
사람들은 박수를 쳐가며 즐겁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한 테이블 건너편에 멋진 선글라스와 스카프를 두른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어깨를 들썩여가며 아이처럼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왠지 그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게 보였다.
조금 걷다 보니까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챘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구시가지 전체가 축제 현장이다! 광장마다 음악이 흐르며 음식과 술을 팔고 골목골목마다 벼룩시장이 열려 온갖 물건들이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잘 만들어진 수공예품을 파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아무 생각없이 창고에 오랫동안 쳐박아둔 물건을 가지고 나온 거 같다. 새 상품이든 중고품이든 골동품이든 모두 내 눈을 즐겁게 했지만 과연 이런 쓰잘데기 없는 물건이 하나라도 팔릴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 다른 광장에서 두 명의 남성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둘 모두 50대 초반 쯤 되어 보였다. 노래를 하는 남성은 마치 킹스맨의 '콜린퍼스'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그 옆의 건반을 치는 남성은 그에 못지 않은 멋진 세미정장을 입고 조그마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이 두 명의 멋진 연주자는 외관만큼이나 힘 있고 세련된 음악으로 관객들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너무나도 멋있었다. '내 중년의 모습이 저랬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명의 예술인 모두 멋진 차림새와 함께 건강미와 개성이 넘쳤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젊은 남녀가 이 멋진 장소와 음악을 배경으로 정열적으로 키스를 하고 있었다.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거 같았다. 아름다운 여자와의 키스는 바라지도 않는다. 옆에 애완견이라도 있어서 같이 다닐 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ㅠ.ㅠ
철학자의 길을 한 이십 분 정도 오르자 구시가지 전경이 내려다 보였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마치 진짜로 수백 년 전의 중세시대로 돌아온 듯 하이델베르크는 그 옛날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간직하고 있었다.
한동안 넋 놓고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십 분 가까이 이런저런 각도로 인증샷을 찍은 후, 올라왔던 길 그대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에 '철학자의 길'인만큼 (사실 이 길은 철학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철학자처럼 나 스스로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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