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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 귀신인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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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횡단 자전거 여행 -

스위스 (2019. 11. 05.)

 

*귀신(또는 미친사람)인 줄 알았지~

*담장 없는 학교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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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또는 미친사람)인 줄 알았지?

 

 스위스는 유럽연합에도 쉥겐 협약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영세중립국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국경에 국경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이 보초를 서고 있는 국경검문소를 지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이라서 그럴까? 잘못 한 일이 없는데도 왠지 긴장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밖에서 보초를 보고 있는 남자가 나를 불러세워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입국거부'를 때려버릴 거 같았다.

 

 사실 입국거부까지는 말도 안되는 일일지라도 나를 불러세울 명분은 충분했다. 난민처럼 빼빼 말라서 자전거에 온갖 짐을 주렁주렁 달고 지나가는 꼴이라니... 위험하게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충분히 수상하게는 보인다.

 

 혼자서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보니 소리소문없이 은근슬쩍 국경을 지나와 버렸다. 아무런 제지도 검문도 당하지 않고 국경을 지나온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한동안 가만히 서서 국경검문소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곰처럼 큰 체격의 보초와 눈이 마주쳤다. 

 

 '엄지 척!'

 

 보초는 이내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더니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인다. 

 

 '그렇군. 이런 것이었군.'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은 워낙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어디 뭐 소말리아 같은 나라에서 날라온 게 아니라 바로 옆나라, 오스트리아에서 넘어왔으니 보초가 나를 의심해야 할 여지는 사실 처음부터 전혀 없었다.

 

 쓸데없는 불안이 사라지고 안심이 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입국 스탬프는?? 스탬프 안 찍어주는거야? 정말 그런거야? 쓉...'

 

 인간이란 참 간사한 존재이다. 주변 상황이 변하자마자 그새 새로운 욕구를 표출시키는 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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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근 해가 중천에 떴다. 마침 나는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3개국이 접하는 '보덴호' (호수)를 지나고 있었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호수 주위에는 공원과 놀이터, 산책로 등이 말끔하게 조성되어 있다. 

 

 요트들이 정박되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어제 밤에 홀딱 젖어버린 텐트와 옷가지들을 말리기 시작했다. 비에 젖을 때의 기분은 정말 물에 빠진 생쥐처럼 비참하지만 이렇게 햇빛에 말리고 난 후 다리미질을 한 듯 빳빳해지고 훈훈한 온기를 품은 텐트나 옷가지들을 보면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 밤은 앞으로 결코 잊지못할 끔찍한 밤이었다.

 

 어제 밤. 해가 슬슬 저물기 시작했고 나는 산의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었다. 비가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비는 거친 바람을 동반한, 굵은 빗줄기로 탈바꿈했다.

 

 산의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에서는 텐트를 필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경사가 있거나 지형이 거친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내려가다가 몇 번 자전거를 세우고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텐트를 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비는 그칠 기세 없이 계속 쏟아졌고 나는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내리막길이 생각 이상으로 계속 이어졌다. 이제는 해가 완전히 떨어져서 주위도 굉장히 어두웠다. 어두운데다가 비바람이 불어치고 길도 좁아서 이대로 달리는 건 위험해 보였다. 어떻게든 빨리 텐트를 칠 곳을 찾아야 했다.

 

 내리막길을 거진 내려온 지점에서 운 좋게 작은 공터를 발견했다. 보아하니 그 앞으로 보이는 아파트에 딸린 공터 같았다. 보통은 주민들의 경계심을 살까봐 이렇게 아파트나 주택에 딸린 공원에서는 캠핑을 하지 않지만 지금은 응급상황이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바로 주위를 한 바퀴 크게 돌면서 안전한 곳인지를 확인했다. 공원은 엄폐물 하나 없이 주변으로부터 꽤나 개방적이었지만 지금 날씨에서는 딱히 큰 문제가 될 거 같지 않았다. 그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야밤에 밖에 나와 산책을 하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공원을 낀 소규모 아파트 단지의 존재가 문제였다. 

 

 아파트 건물은 그 외관으로나 주변을 밝히는 조명으로나 한 눈에 보아도 상당히 고급이었다. 이게 왜 문제냐고? 이런 곳은 야간경비원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혹시 야간경비원에게 발견된다면 좋은 꼴은 보지 못 할게 분명하다!

 

 그러한 이유로 텐트를 치는 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보류하고 근처 어딘가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기로 마음 먹었다.

 

 비는 계속해서 쏟아졌다. 나는 레인자켓을 두 장이나 껴입고 있었지만 이렇게 쉴새없이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굶주리고 있던 배가 드디어 참을성을 잃고 꼬르륵거리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음식들을 꺼냈다. 빵, 치즈, 참치캔, 당근과 콩 통조림을 꺼내어 그나마 비를 덜 맞을 수 있는 나무 밑에서 손으로 허겁지겁 집어 먹었다.

 

 맛있었다! 비록 거지도 이렇게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음식을 먹진 않겠지만 허기가 졌던지라 맛있었다. 백 번을 생각해도 이런 내 꼴이 너무나도 우스웠지만 딱히 비참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여행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지' 라며 심지어는 이 순간이 즐겁기까지 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먹는 것을 멈추고 숨을 죽인 후 귀를 기울였다. 사박사박 낙엽들을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어떤 사람이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거지같아 보여도, 불쌍해 보여도 괜찮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싫다. 나는 그저 자전거로 여행을 하고 있을 뿐이다. 중세시대 먼 길을 가는 나그네처럼 비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머무르게 된 것 뿐이다. 거지와는 다르다. 거지로 오해받는 건 싫다.

 

 이런 생각 외에도 혹시라도 나를 여기서 쫒아내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자라났다. 여기서 쫒겨나게 되면 결국 다시 어딘가에 텐트를 필 장소를 찾게 되겠지만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고 싶은 마음은 정말 추호도 없었다.  

 

 마침내 그 사람이 바로 내 옆을 지나갔다. 흑인이었다. 어둠 속에 언뜻 본 그의 복장으로 보아하니 이 아파트 단지에서 청소나 관리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 같았다. 그말은즉슨, 그에게는 나를 쫒아낼 권리와 힘이 충분하다는 얘기였다. 

 

 한순간 차가운 공기 속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웬걸? 이 남자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무심히 지나간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초능력자처럼 그 시선에서 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휴... 귀신인 줄 알았네... 이건 뭐 하는 인간이지?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밤중에 저기서 저러고 밥 먹고 있네. 120% 미친 사람이 확실하군. 빨리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마침내 텐트를 피고 텐트 안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손과 발은 오랫동안 비를 맞은 탓에 마치 피부 속 피하지방까지 젖은 듯 한동안 그 차가움이 가시질 않았다. 수건으로 대충 온몸에 맺힌 물기를 닦아내긴 했지만 비로 인해 옷에 깃든 습기로 인한 찝찝함이 오랫동안 가시질 않았다.

 

 그래도 텐트에 몸을 눕히는 순간은 언제나 그렇듯 고단한 하루를 아름답게 마치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보통 텐트 위로 똑똑거리며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에 잠을 못 이루지만 이날은 곤히 잠들 수 있었다.   

 

 

담장 없는 학교

*담장 없는 학교라니... 

 

 취리히에 도착했다. 스위스의 상업/문화의 중심도시이자 피파(FIFA)국제축구연맹이 위치한, 규모 면에서 스위스 제 1의 도시이다. 

 

 최근까지 스위스의 수도가 '취리히'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스위스의 수도는 '베른'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취리히'는 미국의 '뉴욕'처럼 스위스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도시이긴 하다.) 

 

 사실 이 '국가-수도'에 대한 관계지도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서도 여전히 어렸을 적 즐겨했던 부루마블 게임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코흘리개 꼬마였던 나는 당연히 부루마블 게임에 단골로 등장했던 취리히, 상파울루, 뉴욕 등이 서울, 도쿄, 런던, 파리 등처럼 한 나라의 수도인 줄 알았다. 

 

 요즘 부루마블 게임은 어떤 지 잘 모르겠지만 설명서에 짧게나마 '보드판 위의 지명은 '국가-수도'와 필연적인 관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라고 덧붙여 놓는 게 내가 겪은 비극(?)을 방지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되지 않을까 싶다.  

 

 도시는 과연 상업/문화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굉장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한동안 유럽 중세풍의 마을들만을 보다가 이런 현대적인 도시를 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 도시에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취리히에는 (현대적으로) 신기하게 생긴 건물들이 많았는데 걔 중 가장 내 시선을 끌었던 건 '담장이 없는 학교' 였다. 

 

 철로를 따라서 난 자전거 길을 달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오더니 내 오른쪽으로 보이던 건물 안에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마구 뛰쳐나온다.

 

 건물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사방팔방 흩어지더니 건물 앞에 조성된 놀이터나 농구장, 축구 골대 등을 점령하고 즐겁게 놀기 시작했다. 내 눈앞에는 순식간에 수많은 아이들로 넘쳐났다.

 

 잠시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멀뚱멀뚱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앞에 이 건물이 혹시 학교?'라는데 생각이 미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 주위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기는커녕 경계가 될 만한 그 어떠한 설치물도 없었다. 건물 자체도 학교로 보이기는커녕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시립도서관 같은 공공시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신선하고 충격적인(?) 장면에 잠시 정신줄을 놓고 있다보니 아까 들었던 음악소리가 또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이번에는 테이프를 거꾸로 감듯이 아까와는 반대의 풍경이 펼쳐졌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건물을 향해 달려오더니 건물 안으로 차례차례 들어가기 시작한다. 얼마되지 않아 아이들의 깔깔거리던 소리로 넘쳐나던 주변 풍경이 언제 그랬냐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졌다. 

 

 여기까지 보고 나니 눈앞의 도무지 학교로는 보이지 않는 건물과 그 주위의 공간이 의심할 여지없는 학교라는 걸(심지어는 초등학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치안이 얼마나 좋고, 이웃들 간, 사람들 간의 신뢰가 얼마나 굳건하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예전보다도 점점 두텁고 높아져 가는 우리나라의 학교 담장이 떠올랐고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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