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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 You are a cyc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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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횡단 자전거 여행 -

스위스 (2019. 11. 7.)

 

*  You are a cyc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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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y. 너 지금 어디 가니?"

 

 Aldi를 향해 달리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뜬금없이 말을 걸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성이 자전거를 타고 나를 쫒아오고 있었다. 자전거를 쓱 살펴보니 앞뒤로 달린 랙과 함께 자전거 프레임에 덕지덕지 붙은 수많은 나라의 국기 스티커가 눈에 띈다.

 

 나는 한순간에 그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자전거 여행자다!'  

 

 그는 자신을 마르셀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고 곧 그는 내게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나 지금 우리 부모님 집으로 점심 먹으러 가는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가지 않을래?"

 

 하필 오늘 하루종일 세수를 하지 않고 심지어는 양치질도 하지 않은 사실이(보통 아침 먹고 꼭 양치를 한다.)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입냄새가 날 거 같으면 말을 하지 않으면 된다!!

 

 작은 언덕을 하나 넘어 곧 마르셀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 마르코의 나이에 비해 유달리 연세가 많아 보이던 두 노부부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뜬금없이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반갑게 환영해주는 사람들이 과연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따뜻한 환대였다.

 

 집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소박하고 아담했으며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서 좋았다. 지어진 지 40년이 넘어서 중간 중간 여기저기 손을 많이 보았지만 마르셀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라고 한다.

 

 나는 식탁으로 안내를 받았고 곧 식탁 위는 여러가지 요리로 가득 채워졌다. 야채가 가득한 따뜻한 스프와 오븐에 구운 고기완자 그리고 '스위스에 오면 꼭 먹어봐야지'라고 벼르고 있던 뢰스터(스위스의 감자전)이 그윽한 향기를 내뿜으며 내 후각을 자극했다.

 

 '이 얼마만의 받아보는 따뜻한 가정식 상차림인가...'

 

 과연 그 맛은?? 

 

 맛있는 요리만큼 사람을 짧은 시간에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없을 거다. 맛있는 요리를 나누어 먹는 것만큼 사람 간의 벽을 빨리 허무는 것도 없을 거다.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을 거다.

 

 식탁 위의 모든 음식은 정말로 훌륭했다. 그동안 유럽에 와서 먹었던 그 어떤 음식보다도 더 맛있고 따뜻했다. 맛도 맛이었지만 마르셀 부모님의 그 넉넉한 인상만큼이나 풍성하고 친절한 마음씨가 요리를 통해서 전해져 왔다.

 

 원래 식사 중 대화를 즐기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말없이 조용히 그릇을 비우고 또 비우고 또 비웠다. 마르셀의 어머님은 그런 나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보이셨다. 그런 그녀를 보며 동서고금에 존재하는 불변의 법칙 하나를 깨달았다.

 

 '색시를 얻으러 친정집에 가게 된다면 밥을 무조건 두 그릇 이상 맛나게 그리고 깨끗하게 비워라!'

 

 "혹시 원하면 내 집에서 며칠 머물다 가도 괜찮아. 내 집도 바로 이 근처에 있거든"

 

 마르셀이 나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나는 바로 'YES!' 라고 대답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과처럼 달콤한 이런 제안을 거절할 내가 아니었다.  

 

 마르셀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마르코의 집으로 향했다. (이 천사같은 노부부는 일부러 밖에까지 나와서 인자한 미소와 격려로 나를 배웅해 주었다. 너무나 고마운 분들ㅠ.ㅠ)  

 

 가는 길에 그는 나를 근처의 초콜릿 공장에 데리고 갔다. 알고보니 스위스도 벨기에처럼 초콜릿으로 유명한 나라였다. 실제로 밀크초콜릿은 1876년 스위스의 다니엘 피터라는 사람이 발명했다고 한다.

 

 외국인과의 대화에서 이런 최초, 최고와 같은 단어가 화두로 등장할 때마다 꼭 내 머릿속을 스쳐가는 짖궂은 장난이 있다.

 

 "어? 초콜릿은 벨기에 초콜릿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 장난이란 '무엇이 더 좋은가? 누가 최고인가? 누가 더 강한가?' 하고 살짝 떠보기!! 이런 장난은 언제나 흥미롭거나 재미난 결과로 돌아온다.

 

 "무슨 소리를! 너 여기 초콜릿 먹어보면 앞으로 벨기에 초콜릿따위는 입에도 대지 않을 걸!"

 

 마르셀은 초콜릿 공장의 직원에게 마치 자기 자식 자랑하듯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 친구는 지금 자전거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중이고, 우리는 방금 맛있는 저녁을 먹고 왔고, 후식으로 여기 초콜릿 맛을 보러 왔으니 맛있는 초콜릿을 내오거라(?) 둥둥.

 

 처음에는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로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마르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는 여직원을 보자 용기가 났다.  

 

 그녀는 가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태도로 내게 직접 이런저런 질문을 해왔고 나는 그녀와 잠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초콜릿 가게를 나와서 나는 마르셀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와. 마르셀. 너 굉장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이 없어. 뭐 딱히 대단하거나 특별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내 얘기에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러자 마르셀이 대답했다.

 

 "앞으로는 사람들에게 네 얘기를 하려고 노력해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좋아해. 그리고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서로 알아갈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 말이야."

 

 

궁금해서 열어본 스위스 가정집 냉장고. 과연 우리와는 다르다!

 “미안한데 나 볼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해. 한 두 시간 정도 집에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그는 내게 저녁으로 맛있는 피자를 만들어 주더니 저녁 식사 후 뜬금없이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나가 버렸다.

 

 스위스 루체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르코의 집은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을 만큼 넓고 쾌적했으며 필요한 가전/가구들이 훌륭히 갖추어져 있었다그렇기에 나는 더욱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야 인마, 내가 여기 있는 물건들 다 훔쳐 가면 어쩌려고?’

 

 마르셀을 만난 지 아직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 마르셀은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Brian이라는 내 영어 이름 이외에는 내 신상정보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자전거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씩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초대를 받아서 이처럼 홀로 방치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보통 농장의 헛간이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거 같은 낡고 초라한 집에 머물 때 또는 어느 정도 신뢰를 쌓은 후와 같이 상식적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나는 부모님의 외출로 집에 혼자 남은 초등학교 5학년생 마냥 자유와 짜릿함(?)을 느끼는 동시에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한 교통정리를 해야만 했다.

 

 ‘혹시 갑자기 나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나를 덮치기라도 한다면? 숙박을 미끼로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면?’

 

 부처님과 성모 마리아처럼 인상 좋은 마르셀의 부모님 내외를 만난 후인 지금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짧은 견문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나는 구태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무서운(?) 상상하고 있었다. 

 

 마르셀은 예정대로 두 시간 쯤 지나서 돌아왔고 다행히도(?) 혼자였다.

 

 뭐하고 왔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소방수라고 하면서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소방훈련을 하고 왔다고 한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는 분명 전기공으로 일하고 있다고 내게 말했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대부분의 소방수는 자원봉사자야. 사실 스위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이런 소방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스위스의 소방수들이 과연 땡전 한 푼 받지 않고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사나운 불길 속에 몸을 던지는 일이 가능할까 의구심이 생겼다.

 

 하지만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 여느 나라를 막론하고 소방수들의 진정한 헌신과 용기 있는 행동은 돈 때문이 아닌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동료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셀의 집에서는 이틀을 머물렀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 최고의 휴식이었다. 제 시간에 정성스레 차려지는 식사와 호스텔에 머물면 꼭 한 명씩은 있는, 악몽보다 끔찍한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를 걱정할 필요 없는 고요한 밤, 그리고 따뜻한 샤워와 마음이 통하는 말동무까지. 

 

 무엇보다도 마르셀 본인이 자전거 여행자이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을 자기 손바닥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효자손 뺨치는 그의 돌봄과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라는 진심어린 말은 지구 반대편의 이 낯선 집을 내집마냥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침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창밖으로 비까지 주룩주룩 내려서 나를 더욱 기쁘게 했다. 엥?? 이건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비 내리는 날 자전거를 타면 몸과 마음이 물에 빠진 생쥐보다 더 비참해지지만 반대로 훈훈한 집안에서 비가 내리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 된 거 같은 설명할 수 없는 통쾌함을 느낀다.

 

 마르셀과는 정말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 둘 다 자전거 장거리 여행자이다 보니 자연히 대화의 주제는 여행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마르셀은 여자 친구와 함께 자전거로 알래스카에서 칠레 최남단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3년에 걸쳐 종단했다고 한다. 집을 떠날 때 부모님에게 3개월만 자전거 타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해 놓고 그게 어떡하다 보니 3년이 걸려 버렸다고... 꽥!!

 

 3년이나 걸린 이유는 여행 도중 잠시 일이 생겨 스위스에 돌아오기도 했었고 무엇보다도 여행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서 또는 우연히 만난 지역 주민들의 집에서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몇 주씩 함께 동고동락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가 보여준 사진은 그런 특별하고 고마운 경험이 압축된, 정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현지 주민들 속에서 그들과 완전히 동화된 채 서부 개척시대의 카우보이처럼 말을 타는 모습, 본인이 소방수인만큼 남미 국가의 소방수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그는 일부러 소방서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알래스카에서 눈앞의 거대한 빙하가 펼쳐진 놀라운 풍경 속에서 캠핑하는 모습 등 정말로 인상 깊었다.

 

 '이런 게 자전거 여행의 진짜 묘미지!!' 

 

 그나저나 3개월이 3년이 되어 버리다니... 뻥튀기도 이런 뻥튀기가 없지만 사실 이런 경우를 심심찮게 보아왔다. 여행을 하다 보니 여행의 묘미에 빠져서 여행 기간이 무한정 늘어나는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푸짐하고 따뜻한 사람들의 존재가 아주 적은 경비로도 장기간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대신에 이 어처구니없는 여행에서 자식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세월라 네월라 기다리는 부모님의 속은 뒤짚어지겠지만서도...

 

 여러가지 작은 사건들도 있었다.

 

 마르셀이 신경 써서 만들어 준 스위스 전통 음식 퐁듀는 먹다가 취할 지경이었다. (마르셀은 '퐁듀에는 와인이 좀 들어가야쥐!!' 라며 와인을 엄청나게 들이부었다.)

 

 그리고 대서사시 같은 마르셀의 아메리카 대륙 종단 자전거 여행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계속되어 졸린 눈을 어떻게든 비벼가며 듣느라 고생이었다. (대서사시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 마지막 사진이 나왔길래 마침내 끝난 줄 알고 내심 기뻐했는데 이제 멕시코까지 끝났고 앞으로 칠레 최남단까지 가야한다고 하더라ㅠ.ㅠ)

 

 하지만 이 정도 고생은 애교로 봐 줄 정도로 정말로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이미 확정된 스위스 '인터라켄'에서의 일정으로 인해 나는 떠나야만 했다.

 

 떠나는 날, 시간에 쫓기던 나는 루체른까지 전철을 타고 가기로 했고 보슬비가 오는 와중에도 마르셀은 역 앞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전철 표까지 사서 내게 건네주었다. (전철로 15분 거리가 자전거 포함 오 천원이었나? 스위스 물가는 미쳤뜸!) 

 

 그의 표정과 행동에는 이별의 아쉬움과 함께 자식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듯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서려 있었다.

 

 자전거 여행은 정말로 즐겁고 때때로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도 많지만 동시에 외로움과 고충도 수반된다. 마르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이 점을 잘 알기에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마르셀에게 정말로 궁금했던 걸 넌지시 물어보았다. 

 

 “처음 만난 날, 너 나를 집에 혼자 두고 나갔잖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리는 방금 만났는데 어떻게 나를 그렇게까지 믿을 수 있는 거야?”

 

 "Because you are a cyclist. (그건 네가 자전거 여행자이기 때문이지)”

 

 이 말은 내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깊은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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