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 횡단 자전거 여행
- 스위스 (2019. 11. 10.)
* 겨울의 알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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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의 알프스.
알프스의 등산로가 이렇게 다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유럽의 정상이라 불리는 알프스의 '융프라우'(Jungfraujoch, Top of Europe, 3,454m)를 쉬엄쉬엄 올라갔다 오면 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인터라켄에서 갈 수 있는 알프스 산맥의 정상 '융프라우'는 오직 산악열차를 타고만 갈 수 있다. 문제는 이 산악열차 표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거다. (사실 이 산악철도의 건설 역사를 알고나면 이렇게 비싼 가격이 어느정도 납득이 간다.)
결국 '융프라우'는 미련없이 깨끗하게 포기하고 '클라이네 샤이덱'(KL.Scheidegg, 2,061m) 까지만 올라가기로 했다.
(나는 어차피 4,000m가 넘는 산들이 즐비한 '세계의 지붕' 이라는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원'을 지날 예정이다. 자전거 여행의 하이라이트!!)
문제는 해발 2,000m가 넘는 '클라이넥 샤이덱'까지 어떻게 올라가면 좋을까인데...
자전거로는 버스와 전철의 종점인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 796m)'까지만 갈 수 있었다.
'1,300m 가까이 등산을 해야 한다는 건데... 뭐 이 정도는 껌이지~ 훗~'
나는 핸드폰으로 간이지도를 살펴보다가 Mannlichen (2,230m) 거쳐서 클라이네 샤이덱으로 올라가기로 등산로를 정했다. 지도를 보니 Mannlichen에서는 주변의 경치가 아주 잘 보일 거 같았기 때문이다.
중간 지점인 Wengen(1,270m)까지의 여정은 아주 여유로웠다.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아침 8시 반이었는데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도중도중 꽤나 가파르고 눈 때문에 미끄러운 길이 있긴 했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날씨도 점점 좋아지고 있었고 가방에는 바나나랑 초콜릿, 빵, 물, 우유 등 간식거리도 충분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가다 보니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려 Wengen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돌릴 겸 Wengen 기차역에서 쉬고 있는데 친구 또는 연인으로 보이는 한국인 관광객 두 명이 내 눈에 띄었다. 반가운 마음에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오셨어요?"
친구 사이였던 두 남녀 분은 어떻게 하다보니 실수로 일행들을 놓치고 Wengen역에 내리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클라이네 샤이덱으로 올라가는 다음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 분들도 이런 예기치 않은 곳에서 혼자 여행하는 한국의 젊은이를 만난게 반가웠던 모양인지 우리는 곧 대화 삼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예요?"
"걸어서 클라이네 샤이덱까지 올라가려고요."
"네?? 그게 가능해요??"
"네. 지도를 봤는데 가능할 거 같아요. 쉬엄쉬엄 올라갈 생각이예요."
"와~ 대단하다. 우리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어요."
여행을 시작한 이후, 줄곧 골치아픈 영어만 써오다가 한국어로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거라서 참 기쁘고 즐거웠다. 우리는 한동안 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기념으로 함께 사진을 한 장 찍고 헤어졌다.
여행의 진정한 재미는 일상생활에서는 나와 결코 마주치거나 섞일 일 없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알프스의 순수하고 맑은 분위기 덕분인지 그 속의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오늘 하루 왠지 잘 풀리 거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걸어올라 갈 수 있을 거라는 내 근거 없는 자신감은 곧 화(火)를 불러왔으니...
Wengen에서 Mannlichen을 향해 올라가는 길의 초반부는 굉장히 좋았다.
주변은 온통 침엽수로 가득했고 나무의 가지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서 뽀득뽀득거리며 눈이 밟히는 소리와 가끔씩 잔가지 위에 쌓인 눈이 떨어지는 소리는 마치 새의 지저귐처럼 내 귀를 흥겹게 했다. 반면에 산 전체에 감도는 깨끗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내 마음을 편안하고 평화롭게 만들었다.
올라가면서 Wengen에 사는 주민으로 보이는 듯한 남자와 마주쳤다. 남자는 애완견과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커다랗고 용맹스러워 보이던 개는 마치 알프스 산 전체가 자기 놀이터인 양 주인 곁을 맴돌며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다녔다.
정말로 오랜만의 등산이기도 하고 특히 눈이 쌓인 겨울산 등산은 도봉산 국립공원에서 공익요원으로 근무하던 시절 이후로는 처음이라서 '알프스 소녀 하이디'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이게 알프스구나!! 역시 이곳에 오기로 한 내 선택은 옳았어!!'
헌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아니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 이건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바닥에 쌓인 눈은 점점 높아져서 이제 어디가 제대로 된 길인지 거의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고 그와 동시에 완만하게 이어지던 넓은 산길이 점점 경사지고 좁고 거친 길로 변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게 맞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다행히도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었기에 계속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침엽수가 가득한 산길이 끝나고 주변이 확 트인 곳으로 접어들었다. 저 아래로는 Wengen과 라우터브루넨이 한눈에 보였다. 알프스의 거대하고 웅장한 봉우리에 둘러쌓인 두 마을은 눈이 쌓여서인지 더욱 고요해 보인다.
문득 호기심이 발동해 바닥에 쌓인 눈을 한 움큼 손으로 집어서 먹어 보았다.
'엇!?!?!??'
맛있었다! 그냥 맛있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맛있었다. 빙수처럼 고운 얼음 입자들이 아주 시원하고 청량하게 입 안으로 퍼졌다. '세상의 그 어떤 얼음이 이보다 더 깨끗하고 맛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위에 시럽만 살짝 뿌려주면 영락없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빙수가 될 거 같았다.
'아... 이 멍청아. 나는 왜 겨울에 알프스를 등산하면서 시럽을 가지고 올 생각을 하지 못 했을까?'
알프스의 눈맛에 한동안 머릿속이 눈처럼 하얘졌지만 곧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올라가는 길은 이제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졌고 무엇보다도 행여나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적어도 Wengen까지는 축구공마냥 눈 위를 또르르 굴러 떨어질 거 같은 가파른 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야 할 지 살짝 고민이 되었지만 아직 희망의 등불이 앞길을 밝히고 있었다. 눈길 위 발자국의 흔적이 여전히 선명했던 것이다.
'누군가 이 길을 지나갔다면 나도 분명히 지나갈 수 있을거다!'
그러나 길은 이제 한 발자국 내딛는데도 내 목숨을 살짝 걸어야 할 정도로 매우 가파르고 위험해졌다. 급기야 눈사태로 인해 도중도중 길이 끊겨서 최대한 조심하면서 높게 쌓인 눈덩이들을 손발을 짚어가며 넘어가야 했다.
이쯤 되고나니 알프스 등산의 즐거움이고 뭐고 다 사라졌다. 그냥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소원은 없을 거 같았다. 혹시 여기서 조난이라도 당한다면 나를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산에 갈 때는 꼭 누군가에 하산 예정 시간을 알려라!!) 이런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억지로 혼자 가려다 사고를 당했다는 오명까지 얻을 거 같았다.
마침 발자국도 사람이 발자국인지 나를 죽음으로 이끄려는 저승사자의 발자국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그 형체가 모호해졌다. 나는 결국 지금껏 내 인생의 가장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돌아가자!'
올라갈 때 전혀 몰랐는데 꽤나 높이 올라왔었나 보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다.
한동안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다보니 신발은 물론이거니와 두꺼운 등산 양말까지 마치 물에 담근 거 같이 홀딱 젖어 버렸다.
한 시간 조금 더 걸려서 Wengen에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내 우매한 선택으로 인한 생고생이었지만 어쨌든 목숨을 건졌다는 생각에 희열이 느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애초에 확실한 정보 없이 계획을 세운 것, 그리고 너무 쉽게 생각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눈이 이렇게나 많이 쌓인 설산을 아무런 장비 없이 무턱대고 올라갈 갈리가 없다.
안내소 벽면에 대문짝하게 붙여져있는 지도를 발견했다. (진작에 봤어야 했는데...) 한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죽을 수도 있었다!'
지도는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는 걸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지도의 축척을 생각해 보았을 때 Mannlichen까지 가는 건 처음부터 목숨을 걸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Wengen에서 Mannlichen까지 지도 상의 거리는 Wengen에서 클라이넥 샤이덱까지 가는 것보다 훨씬 짧았다. 반면 Mannlichen의 해발은 클라이넥 샤이덱보다 200m가 더 높았다. 그말인즉슨 Wengen에서 Mannlichen까지의 길이 엄청나게 가파르다는 뜻!
하긴... Wengen 마을 뒤로는 못해도 80도 정도는 각져 보이는 매우 가파른 자연의 벽이 만리장성처럼 장엄하게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한눈에 보아도(또한 눈길이란 걸 감안할 때) 산양이나 스파이더맨 정도쯤 되야지 올라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눈물을 머금고 창구에서 클라이네 샤이넥으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편도랑 왕복, 어떤 걸 원해요?"
"왕복으로 사면 더 싸요?"
"아니요."
"올라갔다 걸어서 내려올 수 있을까요? (방금 엄한 데 올라갔다 죽을 뻔 했거든)."
"전혀 문제 없어요. 신발이 방수라면 말이지요."
잠시 고개를 떨구고 내 신발을 바라보았다. 평상시에 연녹색인 내 신발은 완전히 젖어서 진녹색, 아니 까맣게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24프랑을 지불하고 클라이네 샤이덱으로 올라가는 편도 기차표를 샀다.
확실히 산악열차가 좋긴 좋다. 열차 안은 멍멍이조차도 의젓하고 침착하게 앉아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안락하고 쾌적했다. 산악열차인지 모를 정도로 흔들림도 거의 없다.
열차의 속도 또한 생각보다 빨랐다. 클라이네 샤이덱까지 올라가는 길에 몇몇 정거장이 있어서 잠시 정차했다. 정차역의 표지판에는 역 이름과 해발 높이가 적혀 있어서 얼마만큼 올라왔는지 시시각각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편안히 앉아서 순식간에 300m~400m씩 올라가는 걸 보고 있자니 '나는 왜 그 개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마 15분이 지나지 않아 클라이네 샤이덱에 도착했다.
클라이네 샤이덱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 말고는 모든 게 다 눈으로 덮여 있었다. 국경의 긴 터널이 아닌 쾌적한 산악열차에서 내리고 나니 눈앞에 설국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착해서 나를 처음으로 놀라게 한 건 그곳의 장엄한 풍경이 아닌 수많은 인파였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아침부터 지금까지 관광객이라고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보지를 못 했다.
'아침부터 코빼기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다 여기 모여 있었군!'
저 멀리 위로는 융프라우가 보였고 올라온 길의 반대편 아래로는 Grindelwald(1,034m)가 보였다. 내 시선 바로 아래로는 스키를 타고 내려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반이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좋긴 했는데 지금은 이보다 더 날씨가 좋을 순 없을 정도로 날씨가 끝내준다. 오늘 융프라우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정말로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들일 것이다. (수시로 변하는 날씨로 인해 융프라우에 섰을 때 맑은 하늘을 보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고 한다.)
어디 앉을만한 곳도 없고 주변이 온통 눈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딱히 구경할 만한 것도 없었기에 나는 바로 하산에 나섰다.
이미 한 번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기에 내려가는 길이 혹시 위험하지는 않을까 약간 걱정했다. 다행히도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길은 해발 2,000m라는 게 믿기지 않을만큼 넓고 평탄했다.
그래서일까? 내려오는 길에 썰매를 타는 어른과 아이들을 발견했다.
'아... 이 멍청아... 겨울에 알프스에 오면서 썰매를 가지고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니.'
오늘 하루만 벌써 두 번째로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앞서 길이 평탄하고 넓다고 말했지만 도중도중 낭떨어지가 보이는 아슬아슬한 길도 있었다. 가속이 너무 붙어서 브레이크 잡는 시기를 놓친다거나 한눈을 팔다가는 그대로 저 어린 나이에 하늘나라 직행이다.
내가 이런 염려를 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신나게 썰매를 타고 내려갔고 그 뒤를 아이들의 부모가 뒤따랐다.
Wengen까지 내려오는데 한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었다. 내려오면서 이 길로 걸어서 내려오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 단 한 명밖에 보지 못 했다. 뭔가 반가운 마음에 저 멀리 앞서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허접한 신발을 신고 있는 나와는 달리 짱짱한 신발을 신은지라 그녀는 큰 어려움 없이 씩씩하고 부지런하게 눈길을 헤쳐나갔다. 하지만 혼자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방금 전에 사랑하는 남자랑 헤어진 것 마냥 적적하고 쓸쓸해 보였다.
'뒤를 바라봐! 여기 하산길에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멋진 남자가 있다고!!'
아쉽게도 그녀는 내 마음 속 외침을 끝끝내 듣지 못 한 채 점점 멀어져만 갔다.
라우터브루넨까지 내려오자 이미 시간은 5시를 넘었고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무사히 하산을 마쳤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리고 바로 피곤이 밀려온다.
그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포근한 안락의자도 따뜻한 저녁차림도 아닌, 다시 숙소까지 16km 정도 되는 길을 자전거로 달려야한다는 세익스피어도 울고 갈 비극(또는 희극)이라는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빌어먹을... 이런 짓도 앞으론 적당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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