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 횡단 자전거 여행
- 스위스 (2019. 11. 14.)
* 스위스 '베른'에서 기차 타고 프랑스 '리옹'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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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베른'에서 기차 타고 프랑스 '리옹' 가기
유럽에서 한 번쯤은 기차를 이용해 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비자 문제로 모든 일정을 최대한 앞당겨야 하는 상황이 운 좋게(?) 찾아왔고 기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에서 프랑스 제2의 도시라 불리는 '리옹'까지의 여정. 도중에 제네바에서 한 번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난민처럼 구명조끼 하나만을 의지한 채 조그마한 보트로 드넓은 대양을 건너는 게 아닌, 거미줄처럼 잘 짜여진 유럽의 철도를 타고 안전하고 편하게 이동하는데 무슨 큰 문제 있겠냐만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일은 시작부터 삐끄덕거렸다.
베른 역에 도착했지만 내 기차를 어느 탑승구에서 타야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표의 모서리까지 구석구석까지 살펴 보았지만 몇 번 탑승구인지 알려주는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호주 시드니의 전철 시스템처럼 아마 실시간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노선이 바뀌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역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전광판을 살펴보자 대략 삼십 분 전부터는 탑승구를 포함한 기차의 모든 정보가 표시되는 거 같았다. 나는 베른 역에 도착하자마자 구입한 자전거 표를 손에 꼭 쥔 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스위스에서는 자전거 표를 별도로 구입해야 한다. 가격은 사람 표와 거의 비슷했다.)
기차 탑승 시간 30분 전부터 전광판을 살펴보기 시작했지만 그 어디에도 제네바행 기차는 보이지 않았다. 10분이 더 지났지만 마찬가지였다. 기차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과 불안이 엄습했다. 나는 '혹시 베른역도 인천공항처럼 탑승구가 분리되어 있나'라는 생각에 방방곡곡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길 잃은 양처럼 허겁지겁 돌아다니는 와중에 갑자기 50대로 보이는 어느 남성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다가올 때부터 이미 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 그리스 시대 철학자 같은 근엄한 표정과 몸짓으로 다짜고짜 내게 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표를 슬쩍 보고 나서 역 중앙의 거대한 전광판을 훓어보더니 머지않아 내가 그토록 간절히 찾고 있던 답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건네주었다.
"흠... oo탑승구로 가면 되네. 아니지. 나를 따라오게나."
철학자 아저씨는 나를 탑승구 바로 앞까지 데려다 준 후 씨익하고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돌아섰다. 너무나 고맙고 친절한 아저씨였다.
사실 이 모든 곤란은 나로서는 한 가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점에서 초래되었다.
내 표에는 목적지가 Geneve cornavin 되어 있었는데 전광판을 아무리 쳐다봐도 이곳으로 가는 기차를 찾을 수 없었다. 단, Geneve airport라고 써져 있는 기차가 있었는데 출발 시간이 같고 목적지 이름이 비슷하기에 저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탈 수는 없었기에 혹시 Geneve cornavin으로 가는 기차가 있나 하고 찾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표에는 적어도 출발 시간 10분 전에 도착한다고 써져 있었지만 기차는 실제로는 5분 정도 연착되었다.
기차의 입구를 보아하니 짐과 자전거를 함께 싣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연착된 기차가 당장이라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짐과 자전거를 싣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나가는 탑승객이 도와주었기에 늦기 전에 모든 짐을 올릴 수 있었다. (사실 기차는 느긋하게 한동안 정차해 있었다.)
기차는 잔뜩 흐린 날씨 속에서 레만 호 주변으로 펼쳐진 넓고 아름다운 와인 밭을 지나는 둥 두 시간 정도를 달려나갔다 . 그리고 목적지 Geneve역에 다다를 때 쯤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전광판을 확인하자 앞으로 정차할 역이 'Geneve'와 'Geneve airport' 이렇게 두 곳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한동안 전광판과 내 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도무지 어디서 내려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내 표에는 목적지가 Geneve cornavin이라고 써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 지도로 검색을 해 본 결과 cornavin은 제네바 기차역이 위치한 거리의 이름 같았다. 그리고 도착 시간을 고려해 보았을 때도 Geneve에서 내리는 게 맞는 거 같았지만 확실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저기요. 혹시 제 표에 적혀 있는 Geneve cornavin이라는게 다음역인 Geneve역을 말하는 건가요?”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그는 아주 분명하게 '그렇다'라며 내게 답을 해주었다.
아무리 통신과 기술이 발달했다고 하나 역시 길 찾는 거에 있어서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인 거 같다.
정말??
문득 대학교 1학년 때 한 동기가 생각났다. 지나가는 행인이 그에게 길을 물었고 그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여기 지리를 잘 안다는 듯이 당당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행인이 사라지고 나는 곧 그가 알려준 길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고 그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너 길 잘못 알려준거 같은데?"
그 친구는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악마처럼 음흉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뭐 어때? 좀 헤매다가 알아서 찾아가는 거지."
결론은... 물어는보되 항상 이중이나 삼중으로 꼭 확인을 하자!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 시련은 이미 예고된 이번 시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앞전의 두 번의 시련은 예상치 못 한 것이기는 했지만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내 임기응변과 정확한 판단에 일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이란 고작 20분도 안 되는 촉박한 시간 내에 리옹행 기차로 갈아타는 것이었다.
'과연 생전 처음 방문하는 제네바 역에서 이 많은 짐과 자전거를 가지고 20분도 채 안되는 환승시간 내에 리옹행 기차로 무사히 갈아탈 수 있을까?'
기차가 제네바 역에서 멈추자마자 나는 재빨리 이 급박한 임무에 착수했다. 차량과 승강장 사이를 날라다니며 재빨리 짐을 내린 후 기차역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 의심의 여지없이 과속이라 할 만한 무서운 속도로 출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감히 일분일초도 낭비할 수 없었다.
제네바 역은 베른 역보다 훨씬 복잡했다. 좁은 통로를 지나 중앙통로로 나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쉴새없이 지나다니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곧바로 열차 정보를 나타내는 전광판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천만다행히도 금방 리옹행 기차를 타는 탑승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탑승구 8. 이곳이 내가 가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일은 결코 생각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사방팔방 살펴보았지만 탑승구 8이 보이지 않았다. 부랴부랴 절망적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며 탑승구 8을 찾기 시작했고 다행히 곧 탑승구 8로 향하는 통로를 찾아냈다. 기차의 출발 시간까지 고작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바퀴벌레처럼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쳐 가는 도중 계단이라는 불청객이 나타났다.
'하필 이럴 때... 망할'
자전거 포함 40kg이 넘어가는 짐을 들고 이 많은 계단을 올라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계단 바로 옆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스위치를 한 백 번은 눌러 대었지만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계단을 올라갈까 하는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탑승객들이 하나둘 내리는데 한 어린아이가 넘어졌다. 그 아이는 곧 일어났지만 덕분에 천금같은 몇 초 정도가 지체되었고 나는 그 순진하고 결백한 어린 아이를 가슴 깊이 저주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탑승구 8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이 맞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꽤나 긴 좁은 통로 끝에는 공항에서나 볼 법한 여러 대의 카메라와 보안 요원 그리고 전신 검색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쉥겐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스위스에서 쉥겐 협약에 가입한 프랑스로 넘어가는 기차다 보니 이런 검색대가 있나 보다.
'여기서 갑자기 소지품 검색을 한다고?? 출발까지 10분도 안 남았는데?'
기적적으로 이곳에서는 공항과 같은 자세한 검사는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 명씩 차례대로 자신의 짐과 함께 네모난 전신 검색대를 지나갈 뿐이었다.
전신 검색대를 지나 좁은 통로를 나왔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착착 맞아 떨어지는 테트리스처럼 여기까지 헤메지 않고 잘 왔지만 혹시 실수로 기차역이 아니라 버스역으로 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자전거나 킥보드를 끌고 여유롭게 걸어가는 여행객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버스역으로 갈 리가 없다!' 라며 안심을 했지만 내 눈으로 기차를 보기 전에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오르막 통로를 다 올라오자 마침내 이미 도착해 있던 리옹행 기차가 나를 맞아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자전거를 싣기 위해서 자전거 칸을 찾아야 했다.
기차 창문에 대문짝만 하게 그려진 자전거 그림 덕분에 금방 자전거 칸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빼꼼 넣어 안을 살펴본 결과, 자전거 거치대 주변에는 자전거는 물론이고 그 앞에 세워진 유모차 등이 얽히고설켜 내 자전거는 고사하고 가방 하나 들어갈 공간도 없어 보였다.
출발까지 단 3분 만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일단 되는대로 어떻게든 쑤셔 넣기로 했다. 그때였다. 어떤 중년의 남성이 구세주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미 거치대에 걸려있던 자전거 주인과 유모차 주인을 찾아내 그들과 쏼라쏼라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곧 카리스마 넘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일사불란하게 물건들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홍해의 기적처럼 내 자전거를 싣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나는 그분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의 뜻을 전하고 마침내 깊은 안도의 한숨과 내쉬며 구석진 좌석에 털썩하고 주저 앉을 수 있었다.
이번 일로 걱정이 정말 많았는데 무사히 리옹까지 올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기차 표를 구할 때부터(기차표 구입은 스위스에서 만난 마르코의 도움을 받았다.) 리옹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참 많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친절한 도움의 손길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영화 '터미널'의 주인공처럼 기차역 안에서 한동안 오도 가도 못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을 테다.
세상은 아름답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아름답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낀 값진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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